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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5회 칠계 김언거, 바람 쐬고 노래 부르다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5회 칠계 김언거, 바람 쐬고 노래 부르다

- 풍영정 風詠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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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을 간다. 풍영정은 극락강과 선창산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중흥파크맨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정자 입구 안내판에는 “풍영정 風詠亭은 김언거(金彦琚 1503-1584)가 세운 정자로서, ‘풍영 風詠’이라는 이름은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온 말이라”고 적혀 있다.

 

먼저 김언거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언거는 자가 계진 季珍, 호는 칠계 漆溪이다. 1503년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1531년(중종 26)에 문과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 및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542년에는 낭관을 지내다가 체직되었고, 1545년에는 금산군수에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1546년(명종1년)에는 경상도 상주목사가 되었다. 1550년에 통정, 응교, 사헌부 장령을 거쳐 1552년에는 사헌부 헌납, 1553년에는 연안부사가 되었고, 1555년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체직되었다. 1557년에 승문원 판교에 올랐으며 1560년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주1)

 

 

풍영정의 ‘풍영 風詠’은 <논어> ‘선진’ 편에서 증점이 공자에게 한 말인 “늦봄에 봄옷이 다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 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 舞雩에서 바람을 쐬고는(風乎舞雩) 노래를 부르고 돌아오겠다.(詠而歸)”의 ’바람을 쐬다‘의 풍 風과 ‘노래를 부르다’의 영 詠에서 따온 이름이다. (주2)

 

정자에는 ‘풍영정 風詠亭’ 현판이 두 개 있다. 정자 밖에 하나, 안에도 하나 있다. 정자에 올라서 극락강을 바라보니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옛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 한 수 읊었음직하다. 정자에는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제일호산 第一湖山’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판 詩板이 걸려 있다.

 

정자 뒤편으로 가니 비가 하나 있다. 비의 앞면에는 ‘문화재 풍영정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풍영정에 여러 시인 묵객이 드나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원래 이 정자는 12동이 있었다 하나 11동은 불타고 없고 지금은 1동만 남아있다.

 

다시 풍영정 정자에 올랐다. 이번에는 정자 안에 있는 편액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본다. 그런데 편액들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 난다. 더구나 편액들이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석천 임억령과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이 지은 풍영정 10영 편액이다. (주3)

 

이윽고 규암 송인수(1499-1547)와 면앙 송순(1493-1582) 그리고 도사 이사필의 시가 적힌 시판 詩板. 지지당 송흠(1459-1547)과 그의 아들 송익경의 시가 있는 편액, 퇴계 이황(1501-1570)과 주세붕의 시판, 그리고 소세양(1486-1562)과 신광한(1484-1555) ․ 정사룡(1491-1570) 세 사람의 시가 적힌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또한 목사 최응룡, 양사기, 임숙영과 김언거 네 사람이 한 구씩 지은 연작시 현판이 제일호산 바로 밑에 걸려 있고, 육봉 박우 ․ 미암 유희춘과 회재 박광옥의 시, 고봉 기대승과 제봉 고경명의 시, 신잠과 오겸 ․ 정유길 ․ 신응시와 이덕형의 시, 정홍명과 고용후의 시, 동악 이안눌과 석주 권필의 시, 우산 안방준과 반계 유형원의 시 편액도 있다.

 

이들 문인들은 시공 時空을 넘나들고 있다. 조선 중종 시대에서 인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시절을 지나 광해군 ․ 인조 이후의 인물도 보이고, 호남은 물론이고 영남과 서울의 선비들을 망라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언거의 풍영정은 송흠의 관수정, 송순의 면앙정처럼 정자문학의 보고 寶庫이다. 가히 조선 시인들의 향연이다. 다만 옥 玉의 티인 것은 김언거의 원운 시 편액이 정자에 안 걸려 있다는 점이다.

(주4)

 

그러면 김언거는 언제 풍영정을 지었을까? 광산김씨칠계공파 문중의 자료에 의하면 김언거가 승문원 판교 시절인 1558년에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송인수와 송순, 그리고 송흠의 시와 퇴계 이황이 1548년에 쓴 ‘김계진 시첩’의 발문을 살펴보건대, 풍영정은 1548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5)

 

먼저 규암 송인수와 면앙 송순 그리고 도사 이사필의 시판 詩板을 살펴본다. 여기에는 ‘제계진정 題季珍亭’이라는 규암이 지은 시가 맨 오른편에 있고, 중간에 면앙이 지은 차사상운 次 使相韻 그리고 도사 이사필이 지은 경차 敬次 시가 적혀 있다.

 

 

우선 규암 송인수의 시부터 감상한다. 시의 제목은 ‘제 계진정 題季珍亭 (계진의 정자에 쓰다)’이다. (주6)

 

 

한 나절 한가한 틈을 타서 만사를 쉬니

하늘 끝 봄빛이 멀리서 근심을 더해 주네

산은 멀고 가까운 도화동 桃花洞을 에워싸고

물이 동서로 나뉘는 두약꽃 핀 모래 물가로다

 

半日偸閑萬事休 반일투한만사휴

天涯春色逈添愁 천애춘색형첨수

山圍遠近桃花洞 산위원근도화동

水散東西杜若洲 수산동서두약주

 

이를 보면 복사꽃과 두약꽃 핀 어느 봄날 송인수는 잠깐 짬을 내서 이 정자에 왔음을 알 수 있다.

 

 

시종 侍從의 자리는 오래 비우고 유랑하기 어려우니

임천 林泉이 비록 아름답긴 하지만 오래 머물지 마소

흰머리는 나와 같아 귀전 歸田이 늦었지만

장한 張翰 (주7)의 외로운 배 가을을 기다리지 않았던가.

 

侍從久虛難浪跡 시종구허난낭적

林泉雖美莫淹留 임천수미막엄류

白頭如我歸田晩 백두여아귀전만

張翰孤舟不待秋 장한고주불대추

 

낙향한 김언거에게 오래 머물지는 말고 관직에 나가라는 조언이다.

 

다음은 면앙 송순의 시이다. 시의 제목은 ‘차사상운 次使相韻’이다. 사상 使相의 운을 따라 읊은 시이다. 여기에서 사상 使相은 중국 송나라때의 벼슬이름으로 덕망있는 재상으로 절도사를 겸한 사람을 말하는데, 송순보다 높은 상관인 것은 틀림없다.

 

차사상운 次使相韻

 

빙허 憑虛를 시력으로 쉴 새 없이 찾으니

(여기에서 빙허는 도 道 혹은 허심 虛心를 말한다.)

누가 청심을 기울여 이 시름을 생각할까

만 겹 먼 봉우리들은 넓은 들을 에워싸고

한 가닥 찬 물줄기는 긴 모래사장을 둘렀어라.

 

憑虛眼力聘無休 빙허안력빙무휴

誰向淸心着箇愁 수향청심착개수

萬疊遙岺圍闊野 만첩요령위활야

一條寒水繞長洲 일조한수요장주

 

 

봄바람 부는 오늘은 절로 흥이 나는데

석양에 귀한 손님 다시 머물라 권하네.

조만간 돌아가 쉬면 모두 다 정해진 곳이 있으니

안개 낀 물결 왕래하며 어찌 가을을 기다릴까?

 

春風此日堪乘興 춘풍차일감승흥

玉節斜陽更勸留 옥절사양경권류

早晩歸休皆有地 조만귀휴개유지

烟波來往待何秋 연파래왕대하추

 

 

그렇다면 시의 운은 무엇인가? 1수의 운은 휴 休, 수 愁, 주 洲 이고 2수는 류 留, 추秋이다. 송인수와 송순은 모두 이 운을 따라 시를 지은 것이다. 송순 다음에 시를 지은 이사필(1503-1556)도 역시 이 운에 따라 시를 지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송인수와 송순 그리고 이사필은 언제 이 시를 지었고, 당시에 이들의 벼슬은 무엇이었을까? 인물 검색을 하면 송인수는 1543년 2월에 전라도 관찰사를 하였고 (주8) 송순은 1543년에 광주목사를 하였으며 (주9), 이사필은 1542년에 전라도 도사(관찰사를 수행하는 부관)를 한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1543년이나 1544년에 계진정에 들른 것이다. 계진이 김언거의 자이니, 김언거의 정자에 와서 시를 지은 것이다. 당시에 김언거는 1542년에 낭관을 지내다가 체직되어 낙향한 상태였다.

 

 

한편 풍영정에는 송흠과 송익경의 시가 적힌 현판이 두 개나 걸려있다. 하나는 송흠과 송익경이 차운시가 적힌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송흠과 송익경 그리고 송교환의 시가 함께 있는 편액이다. 송흠과 송익경은 부자간이다. 송흠은 중종 시절에 청백리를 일곱 번이나 한 청백리이고 송익경도 명종시절에 청백리로 선발되었다.

 

그러면 송흠의 시를 읽어 보자.

 

차운 次韻

 

도연명 옷소매 떨치며 행휴 行休를 느끼노니

헤매던 길임을 깨닫고 수심을 피하고자 함이었네.

어쩌다 다행히도 지금 태평성대를 만났으니

기꺼이 우리의 도를 창주 滄洲에 의지하네.

 

陶公拂袖感行休 도공불수감행휴

應悟迷途欲避愁 응오미도욕피수

何幸方今逢盛代 하행방금봉성대

肯將吾道付滄洲 긍장오도부창주

 

꼭 필요한 시를 짓고 겸하여 풍영도 하지만

늙음에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머무는 것도 마음대로네

규암(송인수의 호)의 소녀운을 따라 화답하노니

그대가 마음속으로 선악시비를 결정하였을까 두렵구려. (주 10)

 

要須言志兼風詠 요수언지겸풍영

遮莫委心任去留 차막위심임거류

追和圭庵少女韻 추화규암소녀운

恐君皮裏有春秋 공군피리유춘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흠, 가정(嘉靖) 25년 모춘(늦봄)

 

가정(嘉靖) 25년은 1546년(명종1년)이다. 송흠은 1546년에 이 시를 쓴 것이다. 여기에서 1수의 행휴 行休는 죽을 날이 눈앞에 닥친 것을 의미한다. 아닌 게 아니라 송흠은 행휴를 느낀 지 1년 뒤인 1547년 11월에 89세로 별세하였다.

 

2수에서 송흠은 규암 송인수의 소녀운을 따라 화운하였다. 송인수와 송흠과의 인연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기록은 1544년 3월의 기영정 잔치이다. 전라관찰사 송인수는 송흠을 위하여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1544년 3월 22일자 중종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주11 참조)

 

 

사진 1. 풍영정 전경

2. 송인수, 송순, 이사필 현판

3. 송흠과 송익경 현판

 

 

 

주1) 조선왕조실록에 김언거는 14회(중종실록 1회, 명종실록 13회) 언급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사관은 그가 임백령 등에게 붙어 벼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하, 퇴계생각, p 113-114 참조)

 

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10월 28일(정사) 7번째기사

 

허자·정옥형·심연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허자(許磁)·정옥형(丁玉亨)·심연원(沈連源)을 겸 지경연사로, 최보한(崔輔漢)을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사(司憲府大司憲兼同知經筵事) 수산군(隨山君)으로, 이황(李滉)을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로, 이명(李蓂)을 홍문관 전한으로, 이세장(李世璋)을 의정부 사인으로, 민기(閔箕)를 검상으로, 이추(李樞)를 사헌부 지평 지제교로, 백인영(白仁英)을 홍문관 교리로,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언거(金彦琚)를 사헌부 장령으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심통원(沈通源)을 홍문관 부응교로, 통천 군수(通川郡守) 윤인서(尹仁恕)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한때의 명사가 거의 다 귀양가고 죽어서 조정이 텅 비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이 직을 제수받았으니, 이른바 용이 죽고 범이 떠나자 송사리가 춤추고 여우가 휘파람 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2) <논어>에 나오는 풍영 이야기 전말을 살펴보자.

 

자로 · 증석 · 염유 ·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을 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의식하지 말고 얘기해 보아라.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만일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로가 불쑥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제후의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군대의 침략을 당하고 거기에 기근까지 이어진다 하더라도,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대략 3년 만에 백성들을 용감하게 하고 또한 살아갈 방향을 알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미소 지으셨다.

“구(염유)야, 너는 어찌하겠느냐?”

염유가 대답하였다. “사방 60-70리 혹은 50-60리의 땅을 제가 다스린다면, 대략 3년 만에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예법이나 음악과 같은 것에 관해서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

“적(공서화)아, 너는 어찌하겠느냐?” 공서화가 대답하였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배우고자 합니다. 종묘에서 제사 지내는 일이나 혹은 제후들이 천자를 알현할 때, 검은 예복과 예관을 갖추고 잔심부름이나 해보고 싶습니다.”

 

“점(증석)아, 너는 어찌 하겠느냐?”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뎅그렁하며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서서 대답하였다. “세 사람이 이야기 한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또한 각기 자기의 뜻을 말 한 것이다.” 증석이 말하였다. “늦은 봄에 봄옷을 지어 입은 뒤, 어른 5-6명, 어린아이 6-7명과 함께 기수 (沂水는 노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강 이름이다 -필자 주) 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 (舞雩는 하늘에 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 필자 주)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욕호기 浴乎沂하고, 풍호무우 風乎舞雩하며, 영이귀 詠而歸 하리이다.)”

 

공자께서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 나는 점(증석)과 함께 하련다.”

 

- <논어> ‘선진 편’ 제25장에서

 

 

김언거도 공자나 증점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나 보다. 그러니 정자 이름도 풍영정으로 지었으리라.

 

 

주3) 풍영정십영(風詠亭十詠)은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 쳐 풍광이 수려한 풍영정의 열 가지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이다.

 

선창범주(仙滄泛舟) 선창에서 배를 띄움

현봉요월(懸峰邀月) 현봉의 달맞이

서석청운(瑞石晴雲) 서석의 개인 구름

금성제설(錦城霽雪) 금성의 개인 눈

월출묘애(月出杳靄) 월출산의 먼 노을

나산촌점(羅山村店) 나산의 마을 가게

양평다가(楊坪多稼) 양평의 많은 곡식

유시장림(柳市長林) 유시의 긴 숲

수교심춘(繡郊尋春) 수교에서 봄을 찾음

원탄조어(院灘釣魚) 원탄에서 고기 낚음

 

 

주4) 광주광역시가 1992년에 발간한 광주의 <누정제영>책

(P 751-755)에는 김언거의 풍영정 원운 시가 수록되어 있다.

 

풍영정 원운

- 주인 김언거 主人 金彦琚

 

벼슬길에 있으면서 전혀 쉬지를 못했는데

잠시 높은 각에 오르니 모든 근심이 줄어드네.

노를 젓는 사공의 외로운 얼굴, 달빛에 비추이고

물을 찾는 기러기 떼 소리, 바람에 차갑구나.

 

㬱緩年來未得休 체완연래미득휴

暫登高閣一刪愁 잠등고각일산수

月邊孤影人移棹 월변고영인이도

風外寒聲鴈下洲 풍외한성안하주

 

이름 있는 이 지역이 한 없이 화려하니

지나가는 길손들이 찾아와서 머무르네.

난간에 기대 앉아 여러 노선비들의 시편을 바라보니

칠수나산이 만추를 감싸네.

 

爲是名區開壯麗 위시명구개장려

仍敎行客故淹留 잉교행객고엄류

憑看諸老詩篇在 빙간제노시편재

漆水羅山護萬秋 칠수나산호만추

 

시는 칠언 율시이다. 압운은 첫 수는 휴 休 · 수 愁 · 주洲 , 둘째 수는 류 留 추秋 이다.

 

 

주5) 이황은 1548년에 발문을 썼다. 발문의 원제목은 跋 書周景遊題金季珍詩帖後(발 서주경유제김계진시첩후)이고, <퇴계집> 권43에 원문이 있다. (이상하, 퇴계생각, p 114-118 참조)

 

 

주6) 그런데 송인수가 시의 제목을 풍영정이라 하지 않고 김언거의 자를 따서 계진정이라 한 것은 특이하다.

 

 

주7) 장한 張翰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서 가을바람이 불면 고향인 송강 松江에서 나는 농어 맛이 생각나서 일부러 귀향했다 한다.

 

 

주8) 중종실록 1543년 2월 12일자

 

송인수를 전라도 관찰사에, 원혼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하다

 

송인수(宋麟壽)을 전라도 관찰사에, 원혼(元混)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주9) 송순은 1543년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광주목사를 자청하였다. 그런데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래서 1545년 을사사화를 피할 수 있었다.

 

 

주10) 恐君皮裏有春秋(공군피리유춘추)

 

피리춘추 皮裏春秋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피리(皮裏)는 피부의 안 곧 심중 心中이고 춘추(春秋)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 노(魯)나라의 역사서(曆史書)로 공자(孔子)가 필삭한 것이라 전해진다. 즉 흥망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주11) 중종실록 1544년 3월 22일 자

 

전라도 관찰사가 영광군에 순찰 가서 판중추를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다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宋麟壽)가 영광군(靈光郡)에 순찰 나가, 판중추(判中樞) 송흠(宋欽)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은 논한다. 송흠은 이 고을 사람이고 정자는 곧 송인수가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이어받아 세운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어 영광스럽게 해 준 것이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榮達)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었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觀水亭)이란 편액(扁額)를 걸고 날마다 한가로이 만족하게 지내기를 일삼았으므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존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집에 있을 적이면 종일토록 의관(衣冠)을 반듯하게 하고 조금도 몸을 기울이지 않고서 오직 서책(書冊)만을 대하였고, 고을 안의 후진(後進)을 접할 때에는 비록 나이가 젊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당(堂)에서 내려가 예절을 다했었다. 그의 어머니도 가법(家法)이 또한 엄격하여 감히 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나이가 1백 살이었다. 송흠 또한 90이 가까운데도 기력(氣力)이 오히려 정정하였다. 특별히 조정에서 숭품(崇品)을 총애하는 은전을 입게 되었으므로 논하는 사람들이 인자한 덕의 효과라고 했었다. 도내(道內)에서 재상(宰相)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朴守良)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 참고문헌 >

 

o 광산김씨 칠계공 문중, 홍순만 번역, 풍영정 시선, 호남문화사, 2007

o 광산김씨 칠계공 문중, 칠계유집, 호남문화사, 2004

o 광주직할시, 누정제영, 태양사, 1992

o 김세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온새미로, 2013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o 김세곤, 청백리 송흠, 온새미로, 2011

o 이상하 지음, 퇴계 생각, 글항아리, 2013

o 이일영 역, 국역 지지당 유고, 효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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