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3회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3회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

- 광주 송호영당 (2)

 

퇴계 이황(1501-1570)은 늙고 병들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선조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마침내 이황은 1569년(선조 2년) 3월4일 밤에 선조를 면담하고 사직 허락을 받았다. 선조는 마지못하여 퇴계의 낙향을 허락하면서 조정 신하 중에서 학문하는 이를 한 사람 추천하라고 한다. 퇴계는 처음에는 추천을 안 하다가 선조가 세 번까지 묻자 고봉 기대승을 추천하였다.

주1)

 

기대승 같은 사람은 글을 많이 읽었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가히 통유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렴 공부는 아직 부족한 듯합니다.

 

퇴계가 영남의 직계 제자들을 젖혀두고 고봉을 선조에게 추천한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퇴계는 고봉을 성리학에 가장 밝은 후학으로 평가하였다.

 

3월 5일에 퇴계는 서울을 떠난다. 이 날 기대승, 박순, 이담 등이 퇴계를 동호(東湖)에서 전송하여 강가의 농막에서 유숙하였고, 봉은사까지 따라가 송별한다.

 

고봉은 동호의 배 위에서 한 절구의 이별시를 퇴계에게 드린다.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 한강수야 漢江滔滔日夜流

떠나시는 우리 선생 네가 좀 말려다오 先生此去若爲留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 沙邊拽纜遲徊處

떠나심에 애 간장 가득 찬 이 시름을 어이하리. 不盡離腸萬斛愁

 

박순도 시를 짓는다.

끊임없는 고향생각 고리처럼 이어지시더니 鄕心未斷若連環

한 필 말로 오늘에야 도성문을 나서셨구려 一騎今朝出漢關

추위에 묶여 매화가 봄인데도 안 피었으니 塞勒嶺梅春未放

꽃을 아껴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린 것이리. 留花應待老仙還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증별시를 짓는다.

 

퇴계 이황은 일일이 화답하지 못하고 기대승과 박순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전별 나온 이들에게 읊는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 名流이니 列坐方舟盡勝流

돌아가고픈 마음 하루 종일토록 매어있네. 歸心終日爲牽留

이 한강수 떠다가 벼룻물로 써서 願將漢水添行硯

끝없는 작별 시름 베껴 보려네. 寫出臨分無限愁

 

물러감 윤허하시니 쫓겨남과 어이 같으리 許退寧同賜쾌環

어진 분들이 내 고향 가는 길 전송하시네 群賢相送指鄕關

부끄러워라 네 임금 四聖의 후한 성은 입고서 自慙四聖垂恩眷

부질없이 일곱 번이나 왔다 떠났다 했구나. 空作區區七往還

주2)

 

그런데 안동으로 내려간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머물다가 1570년 12월 8일에 별세하였다. 박순은 만시를 쓰고 묘비명을 지었다. 주3)

 

박순은 승승장구하였다. 1569년 7월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1572년 7월에 영의정 이준경이 죽자 우의정이 되었다. 157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영의정 이준경은 1572년 7월7일 차자(간단한 상소문)을 유언으로 올려 붕당의 조짐을 알렸다. 심의겸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선조가 누가 붕당을 만드는가를 물었을 때 심의겸과 이이 등은 강력 부인하였다. 주4)

 

그러나 이준경의 예견대로 1575년에 붕당이 현실화 되었다. 사림이 분열한 것이다. 붕당은 이조전랑을 둘러싼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충돌이 발단이었다. 주5)

 

이어서 황해도 재령에서 주인을 죽인 노비 재판 사건으로 박순과 허엽이 노골적으로 알력을 하면서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 서경덕에게서 동문수학한 박순과 허엽은 결별하였다. 박순은 서인의 영수, 허엽은 동인의 영수가 된 것이다. 주6)

 

1578년에 삼윤 三尹 사건이 일어나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경연에 입시한 동인의 김성일이 진도군수 이수가 서인의 중진인 윤두수 ․ 윤근수 형제와 그들의 조카 윤헌에게 쌀 수 백석을 뇌물로 바친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세 사람은 뇌물수수 혐의로 파직되었다.

 

한편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중간에 서서 조정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이의 화해 노력은 그리 잘 되지는 못했다. 동인에게는 서인을 편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583년 여름,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함경도 종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긴박하자 이이는 임의로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이이가 ‘병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교만하게도 임금을 무시하였다’하여 이이를 탄핵하였다.

 

이 탄핵은 박근원 ․ 송응개 ․ 허봉 등 동인이 주관했는데, 이들은 박순 ․ 이이 ․ 성혼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고 공세를 확산시켰다.

 

서인은 일대위기였으나, 조정에서 이이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를 두둔하여 상소를 올렸고 선조도 이이와 성혼을 지지하였다. “나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고 싶다고”하면서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와 지조가 있고 물과 달 같은 정신이 있다 松筠節操 水月精神 ”고 하면서 신임을 보였다. 이를 보고 논박하는 자들은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일컬었다.

 

선조는 동인의 송응개, 허봉, 박근원을 각기 회령, 갑산, 강계로 유배 보냈다. 이를 계미삼찬 癸未三竄이라 한다.

 

계미삼찬 이후 서인은 다시 정국을 주도하였다. 선조는 이이를 이조판서에 성혼을 이조참의에 임명하였다. 영의정 박순이 천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1584년 1월16일에 율곡 이이(1536-1584)가 별세하였다. 나이 49세였다. 주7) 성혼은 사직하고 파주로 귀향하였다. 박순만 홀로 조정에 남았다.

 

그런데 선조는 1585년 2월에 귀양 간 박근원 ․ 허봉 ․ 송응개를 사면하였고 동인들을 더 많이 등용했다. 동인들은 박순 ․ 정철 ․ 윤두수 등 서인들을 연일 탄핵하였다. 주8) 마침내 1585년 9월에 선조는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서인의 몰락이었다.

 

박순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름뿐인 벼슬자리였다. 이후 박순은 홍문관 수찬 정여립의 탄핵을 받아 영중추부사 자리마저 물러나 용산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

 

박순은 1586년 7월에 경기도 영평으로 아예 은거하였다. 선조는 박순에게 동대문 밖 보제원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주면서 사직하지 말고 몸조리 후에 다시 돌아오라고 하였다.

 

박순은 이별시를 부채에 써서 선조에게 보냈다.

 

 

은혜에 보답할 재주 없음이 마음에 거리껴 答恩無路寸心違,

쇠잔한 몸 추슬러 시골집으로 돌아가나이다. 收拾殘骸返野扉。 종남산이 한 점 되어 갈수록 멀어져 가는 데 一點終南看更遠,

서풍에 눈물 흘려 칡넝쿨 옷(碧蘿衣)을 적시나이다. 西風吹淚薜蘿衣。

주9)

 

 

주1) 선조실록 3권, 2년(1569년) 3월4일 기사, 선조수정실록 3권,

2년(1569년) 3월 1일 기사를 참조 바람

 

주2) 안동으로 물러난 퇴계는 박순을 칭찬하기를, “화숙(화숙은 박순의 자)과 마주하고 있으면 한 덩어리 맑은 얼음과 같아 정신이 아주 상쾌하다‘고 하였다. 고봉 기대승 또한 박순을 평하기를 “의리 義理를 분석함이 밝고 또 아주 절실하니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하였다.

 

 

주3) 이황에 대한 박순의 만시는 이렇다.

 

신령한 이치는 원래 어둡고 막연하지만

선생께서는 어찌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셨나.

하늘 한 가운데 주춧돌을 옮기고

나라 진산의 기반이 무너졌네.

 

끊어진 학통 누가 이으려나.

남긴 책이나마 엿볼 수 있으리라.

서늘한 달의 자취에서

천년을 두고 금기 襟期(마음속에 품은 회포)를 보게 되리라.

 

한편 이황은 자신의 묘소에 묘비를 단촐하게 세우라고 유언하였다. 만일 기고봉 같은 이에게 부탁하면 사실에도 없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비웃음을 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러한 이황의 유언에 따라 이황의 묘비명은 처음에 대제학 박순이 지었다. 그런데 그 사연이 정확하지 못하여 다시 기대승이 비문을 쓰게 된다. 지금 퇴계 묘소에 세워진 묘비명은 기대승이 쓴 비문이다. (김세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P 198-202와 퇴계집 언행록 5 유편(類編) 고종기(考終記) 참조)

 

주4) 영의정 이준경의 졸기와 임종 때 올린 차자는 1572년 7월 7일자 선조실록을 참고 바람

 

 

주5) 1572년(선조 5년) 2월에 이조정랑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한 수재였다. 그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심의겸이 반대한 이유는 김효원이 권신인 윤원형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권신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김효원이 낙마하자 그를 추천한 오건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파문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조정랑은 정5품의 관직으로 비록 품계는 낮은 자리이지만 인사 행정을 담당한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당상관도 이조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을 정도였다. 이조정랑은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정랑직을 어디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다.

 

심의겸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1574년에 이조정랑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다음 해인 1575년에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거론되자 김효원은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후임으로 이발을 추천했다. 이발은 광주 출신으로 이중호의 아들이었다.

 

 

결국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선배사림과 후배사림의 분열이라 일컬어지는 ‘동서분당’으로 이어졌다.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 낙산에 산다하여 동인, 심의겸이 서쪽의 정동에 산다 해서 서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선 ․ 후배 사림의 싸움이 격화되자 선조는 1575년 10월에 심의겸을 개성유수로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발령하였다.

 

주6) 1575년 8월에 황해도 재령에서 종이 주인을 죽였다고 추정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심의겸과 친분이 있던 좌의정 박순이 담당했다.

 

박순은 시신을 검시했지만 분명한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자 영의정 홍담은 죄 없는 종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사간 허엽은 그래도 종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허엽은 죽은 사람과 일가였는데, 선조는 증거부족을 이유로 종을 석방했다. 이를 분하게 여긴 허엽은 박순의 추고를 요청했고 사간 김효원도 동조하였다. 정철 ․ 김계휘 ․ 윤두수 등 선배 사림은 이것이 박순을 퇴진시켜 심의겸 세력을 고사시키려는 의도라고 여겼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의견이 갈렸다. 그러는 사이 선 ․ 후배 사림간의 분당은 굳어져 갔다.

 

주7) 율곡 이이가 1584년에 별세하자 박순은 다음과 같이 만시를 지었다.

 

일찍이 엄명을 받들고 구름속의 문에서 나와

명군의 시대를 위해 태평을 이루려 하였네.

아침 저녁으로 나랏일을 조정했는데

국가가 이제 견고한 성 城을 잃었네.

 

주8) 송강 정철(1536-1593)도 1585년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담양 창평으로 내려와 1589년까지 지냈다

 

 

주9) 선조수정실록 1586년 7월1일자 기사를 참고바람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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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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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차주환 엮음, 역해 사암집, 충주박씨문간공파문중,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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