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2회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2회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

- 광주 송호영당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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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용아 박용철(1904∼1938) 시인 생가 뒤에 송호영당이 있다. 이곳에는 기묘명현 눌재 박상(1474-1530)과 사림재상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먼저 박순의 영정을 감상하여 보자. 참으로 후덕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절제된 기품이 배어 있다. 박순은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이다. 정승만 내리 14년을 하였고 영의정에 있던 기간이 7년이었다.

 

박순의 자 字는 화숙(和叔), 호 號는 사암(思庵)이다. 주1). 아버지는 개성유수와 전주부윤을 한 육봉 박우(1476∼1547)이고 큰 아버지는 1515년에 신비복위소를 올린 기묘명현 눌재 박상이다. 할아버지 박지흥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자 충청도 회덕에서 살다가 광주로 은거하였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은 박지흥 처가 계성 서씨(桂城徐氏)마을 근처였다.

 

박우는 분가하여 부인 당악김씨의 향리인 나주 공산에 기거하였고 박순은 1523년 10월에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박순이 6세 되던 1528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박순은 광주 서모의 집에 맡겨져 그곳에서 컸다.

 

 

 

박순은 18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송도 3절중 하나인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에게 수학(受學)하였다. 주2) 박순과 같이 공부한 사람은 초당 허엽(1517-1580), 토정 이지함(1517-1578) 등이다.

 

1546년에 서경덕이 돌아가셨다. 1547년에는 부친 박우가 별세하자 박순은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박순은 절개 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나이 31세인 1553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에 정예관료가 된 후에도 조용히 지내면서 수양을 하였다. 이렇듯 수기 修己를 한 박순은 의외로 빨리 이름을 알렸다.

 

1556년에 그는 중국 사행길에 들여오는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가 되었다.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압록강변 의주에서 박순은 밀수품이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건인줄 알면서도 가차 없이 압수해 버렸다. 대부분의 어사들이 왕실과 권신의 위세에 눌려 직무를 소홀히 하던 상황에서 박순은 엄격함과 과단성을 보인 것이다.

 

한편 박순은 1561년 홍문관 응교 시절에 임백령 시호 사건으로 시련을 겪는다. 을사사화의 주역 임백령이 1546년에 죽자 이를 슬퍼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시호를 내리도록 명종을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임백령의 시호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높은 시호를 올리면 권세에 아첨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윤원형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므로 주저하고 있었다.

 

박순은 임백령이 큰 아버지 박상의 제자라는 인연을 생각하여 소공(昭恭)이라는 시호를 지어 올렸다. 주3)

 

‘이미 과오가 있으나 고칠 수 있다’는 소 昭와 '모습과 거동이 공손하고 아름답다.’라는 공 恭을 쓴 것이다. 윤원형은 격분하였다.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에게 충 忠이나 문 文자의 시호를 올리지 않다니. 지금도 1545년 을사년 일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니.

이 사건으로 박순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나주로 귀향한다. 주4)

때는 1561년 5월이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도 이를 애석해 하였다.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편지에 나온다. 주변 사람들의 동정이 많아서였을까. 박순은 그 해 12월에 한산군수에 임명되었다. 주5)

 

1565년 4월, 20년간 권력을 농단한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별세하였다. 그녀는 조선의 측천무후라 할 불릴 정도로 나라를 주물렀다.

 

정국은 요동쳤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20년간 지속된 문정왕후의 세도가 그대로 유지될 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대사간 박순이 척결에 앞장섰다. 5월에 문정왕후가 병조판서로 임명한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더니, 8월초에는 대사헌 이탁을 설득하여 양사 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권력자 윤원형을 탄핵한 박순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이제 죽을 자리에 왔다'라는 각오로 한 결단이었다.

 

그런데 윤원형은 한 번의 상소로 물러나지 않았다. 박순은 첫 번째 상소 11일 만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26가지나 상세하게 열거하면서 탄핵하였다. 윤원형의 첩인 요부 정난정에 관한 사항도 물론 포함되었다.

 

명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외삼촌 윤원형을 파직시키고 유배 보냈다. 마침내 명종비의 인척 심통원 등 외척들마저 물러나고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박순은 사림의 리더가 되었다.

 

한편 박순은 겸양의 선비였다.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1568년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황은 제학이 되었다. 이황을 스승처럼 모시는 박순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야 한다고 자기 자리를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 주6)

 

 

한편 졸지에 대제학이 된 이황은 이를 끝까지 사양하고 직임을 받지 않았다. 이황은 정유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화숙(박순의 자)이 대제학을 맡고 있으면서 나를 추대하고 자신은 사양하여 마침내 이 관직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주7)

 

 

사암 박순이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영조 시절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 ‘인사문’에서 사암능양 思庵能讓(박순이 겸양에 능하다)이란 제목으로 이 일을 기록하여 박순을 칭송하고 이욕추구에만 급급했던 당시 세태를 한탄하였다.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당시 대제학 박순이, “신(臣)이 대제학인데 퇴계 선생은 제학이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이황의 벼슬을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여.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오늘날 이욕만 챙길 뿐 이를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

 

 

 

 

주1) 박순은 일찍이 충청도 회덕 懷德 선암천 船巖川 서쪽 기슭에 있는 증조부 박소 朴蘇의 묘소 아래에 집을 지어 영사암 永思庵 이라는 편액을 걸고 독서하였는데, 이 집 이름 사암 思庵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주2) 송도삼절(松都三絶)은 송도(松都), 즉 개성에서 유명한 세 가지로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이르는 말이다. 박순이 서경덕에게서 공부를 배운 것은 그의 아버지 박우가 개성유수 시절에 서경덕과 교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3) 박상과 임억령과 임백령의 인연은 이러하다.

 

석천 임억령 (1496-1568)과 임백령(? -1546)은 해남 출신이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이름 중에 마지막 글자 령은 문중의 항렬이고, 가운데 글자는 대망을 의미하는 숫자인 천, 만, 억, 백, 구를 얹어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라 하였다.

 

임억령과 임백령은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눌재 박상(1474-1530)의 제자가 된다. 박상은 임억령에게는 장자를 읽으라고 하면서 ‘너는 문장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백령에게는 논어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족히 나랏일을 담당할 것’이라 하였다.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한 직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친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당을 모두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 윤원형 일파의 오른팔인 임백령은 형 임억령에게 이 모의를 알리고 함께 일하기를 권유한다. 임억령은 아우인 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 나온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준다. 괜스레 외척들이 붕당이나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好在漢江水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安流莫起波

 

그러나 15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이조 참판, 호조판서 등을 거쳐 이조판서였던 임백령은 윤원형,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의 외삼촌 윤임 일파를 제거하였다.

 

우의정으로 승진한 임백령은 1546년 6월에 사은사로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주4) 우암 송시열이 지은 박순 신도비명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윤원형이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忠)’ 자가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헤아릴 수 없는 뜻을 품고 공을 국문하여 치죄하려고 하였으므로 사류(士類)들이 흉흉하게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였다. 주상이 장차 중죄(重罪)로 다스리려고 하다가 구원한 사람이 있어 파직하여 축출하라고만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의금부(義禁府)에서 명을 기다리려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태연히 나갔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는 줄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올 때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자, 공이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칫하면 너를 다시 보지 못할 뻔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남쪽으로 돌아갔다.

 

 

 

주5) 명종 27권,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12월 22일(정축) 2번째기사

 

박순과 황정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순(朴淳)을 한산 군수(韓山郡守)로【다소 학식이 있고 성품이 굳센 듯하였다. 일찍이 시호(諡號) 짓는 일로 윤원형에게 미움을 사서 배척당했다. 뜻과 학식이 고명하고 성품이 강직했다. 이양(李樑)이 귀척으로 붕당을 많이 맺었는데, 일찍이 교유(交遊)를 여러번 청하였지만 가지 않았다.】, 황정욱(黃廷彧)을 예조 좌랑으로 삼았다.

 

주6) 선조 2권, 1년(1568 무진 / 명 융경(隆慶) 2년) 8월 26일(계묘) 1번째기사

 

박순·유희춘·윤강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순을 대제학으로, 유희춘을 응교로, 윤강원(尹剛元)을 장령으로 삼았다.

 

 

선조수정 2권, 1년(1568 무진 / 명 융경(隆慶) 2년) 8월 1일(무인) 1번째기사

 

이황에게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게 하다

 

이황(李滉)에게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게 하였다. 그때 박순(朴淳)이 대제학, 이황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박순이 사양하기를, ‘나이많은 석유(碩儒)가 차관(次官) 자리에 있고 신이 후진(後進)의 초학으로서 그 위에 있는 것은 맞지 않은 일이니 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여 이 명이 있었다. 그러나 황이 다시 굳이 사양하여 갈리었다.

주7) 당시에 이황은 선조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왔으나 하루빨리 안동으로 물러나고 싶어 했다.

 

이황은 1569년 3월4일에 선조 임금의 허락을 받고 서울을 떠나 안동으로 물러간다. 그리고 1570년 12월에 별세한다.

 

 

사진 : 박순 영정

 

 

< 참고문헌 >

 

 

o 국사편찬위원회, 명종 ․ 선조실록 등,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o 박석무, 조선의 의인들, 한길사, 2010

o 박하련, 눌재와 사암 할아버지 이야기, 재경충주박씨종친회, 2007

o 신용철, 사암 박순 선생의 생애와 사상, 포천문화원, 포천을 빛낸 인물연구, 2007 p 57- p 104

o 이상하, 퇴계 생각, 글항아리, 2013

o 이영춘외 지음, 조선의 청백리, 가람기획, 2006

o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2, 휴머니스트, 2006

o 이종범, 사림열전, 아침이슬, 2006

o 차주환 엮음, 역해 사암집, 충주박씨문간공파문중, 1979

o 허경진 옮김, 사암박순 시집, 한국의 한시 24, 평민사, 1998

o 허균, 성소부부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고전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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