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14회 나주월정서원을 가다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 2부> 제14회 나주 월정서원을 가다


   나주에 있는 월정서원을 찾았다. 거기에는 고봉 기대승과 인연이 있는  김계휘, 박순, 심의겸, 정철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월정서원 주소는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광곡마을이다. 네비게이션에 서원의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아  우선에 노안면 금안리 입구부터 갔다. 그곳에는  신숙주 생가라는 표시가 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신숙주 생가를 먼저 가기로 하였다.  신숙주는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 한다.  사육신 성삼문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 최고의 문인. 그는 숙주나물이란 말도 남긴 선비이기도 하다. 그의 생가는 마을 주택가에 있었다. 집에는 들어갈 수 가 없다. 들어가려면 표시판에 적힌 후손 연락처로 전화를 하면 안내하여 준단다.

그 근처에 쌍계정이 있다. 이 정자를 둘러보니 그곳에 사암 박순의 시가 적혀 있다. 사암 박순. 그는 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성유수를 한 박우이고 큰 아버지는 1515년에 신비복위소를 올린 기묘명현 눌재 박상이다.

   이제 월정서원을 찾는 일만 남았다. 주변 사람에게 물었다. 산길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한참 올라가니 사당이 하나 나와서 이곳이다 생각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곳은 홍씨 문중 사당이다. 다시 주변을 찾았으나 서원 안내 표시판도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다시 두 사람에게 물어 물어서 겨우 월정서원을 찾았다. 서원은 입구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담이 헐어져 있다. 서원이 너무나 방치되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헐어진 담으로 들어가니 강당에는 월정서원, 사당에는 월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월정사 사당 안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김계휘, 박순, 심의겸, 정철, 홍천경의 신위가 의자 위에 놓여 있다.  

   자료에 보면 월정서원은 1659년(효종 10년)에 사암 박순의 학덕을 흠모하는 도내사림들의 발론으로 홍합이란 사람이 서원 건립을 청하는 상소([사암집] [月井書院請建疏] 1659년, 홍합 찬)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1664년(현종 5)에 창건되었으며, 박순 (朴淳) ·김계휘(金繼輝)·심의겸(沈義謙)· 정철(鄭澈)의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669년(현종 10년)에 사액이 내려졌으며, 이때에 치제관으로 예조정랑 강복원이 파견되었다. 현재 월정서원에는 역대원장의 명단이 남아 있는데, 초대원장은 민유중, 원이(院貳)는 남구만이었고, 이 밖에 송시열, 유척기, 김원행 등의 서인 노론계 인사들 이 기록되어 있다[月井書院座目].  1767년에는 홍천경(洪千璟)을 추가 배향했다. 한편 1787년(정조 11)에 서원의 중수가 이루어졌고 1796년(정조 20)에 강당이 중수되었으며, 1802년(순조 2)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삼문을 중수하였다. 당시의 원장은 한용구였고, 강당명은 월원당, 동재는 은구재, 서재는 지숙재, 정문은 진덕문이라 편액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32년(순조 32) 2차 중수가 있었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어 원래 나주 남쪽 입구인 목포-광주간 국도변(현재 상담비가 세워진 곳)인 구지(舊址)에 설단 제향하였는데, 당시의 제향과 이건(移建), 복건사업(復建事業)들은 홍천경의 후손들(풍산홍씨)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1913년 유지에 유허비를 홍승경이 건립하였고, 1974년 현재의 위치에 터(풍산홍씨가 문답 기증)를 잡고 사우와 강당 등 건물을 옮겨 중건하였다. 1974년 복설 시에 월정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정사에 배향된 다섯 분은 모두 서인의 대표인물이다. 심의겸은 동서분쟁의 주역으로서 서인을 탄생시킨 사람이고 박순은 서인으로서 15년간이나 재상을 한 사람이고,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서인 중에서 골수 보수파 영수이다. 김계휘는 그의 아들이 김장생,  손자가 김집인데 이들이 서인 중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키운 스승이다.  
  

  먼저 박순(朴淳 1523~1589)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박순과 기대승의 인연을 생각하여 본다. 박순. 그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이다.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과 함께 1565년에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대제학,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 우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정승을 재직하였다. 율곡 이이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지금의 포천) 백운산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에 연구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와 서예에 뛰어났다. 중년에 퇴계 이황을 사사(師事)하였고, 만년에 율곡 이이및 우계 성혼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고봉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저서에 《사암집》이 있다. 사암 박순. 그는 진솔하고 절개 있고 겸양을 갖춘 선비였다.


박순은 절개 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그는  나이 31세인 1553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고 3년 후, 밀수품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은 수은어사가 되어 의주에서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밀수품을 압수하였다. 왕족의 부정행위를 파헤친 것이다. 요즘 같으면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기획수사를 한 것이다.  

  또한 그는 겸양의 선비였다.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대제학이 된다.  이때 그가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사암능양 思庵能讓이란 글을 쓴다. 사암 思庵(박순의 호)이 겸양에 능하다는 글이다.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그때 대제학 박순이, “신(臣)이 대제학인데 퇴계 선생은 제학이 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서로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 충분히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지금에는 이욕만 챙겨 이런 것을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


    이 겸양의 사례는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에도 나온다. 1569년에 안동 도산으로 물러난 퇴계는 사암을 칭찬하기를, “화숙 (화숙은 박순의 자)과  마주하고 있으면 한 덩어리 맑은 얼음과 같아 정신이 아주 상쾌하다‘고 하였다. 고봉 기대승 또한 박순을 평하기를 “의리 義理를 분석함이 밝고 또 아주 절실하니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하였다.

기대승과 박순과는 고향이 같아서 매우 친하였다. 나이는 박순이 많았지만 고봉이 더 선배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고봉과 퇴계가 주고 받은 편지에는 박순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퇴계가 고봉에게 박순이 본이 어디인지를 묻는 대목도 나온다. 충주 박씨임을 퇴계가 몰랐나 보다.  

고봉이 쓴 시중에는 박순의 시를 차운한 시도 있다. 이를 감상하여 보자.

    박화숙의 시에 차운하다.

음침한 비 갑자기 개니 / 陰雨忽云霽
석양이 창가에 들어온다 / 夕陽來入窓
옷깃을 여미고 스스로 살피며 / 斂襟獨自省
이 한 마음을 시험해 보았네 / 驗此一團腔

또〔又〕

달은 구슬 같은 나무에 걸렸고 / 月掛珠璣樹
구름은 창칼 같은 산에 비끼었네 / 雲橫劍戟山
옥퉁소 부는 소리 멎지 않는데 / 玉簫吹不徹
차가운 깊은 밤에 외로운 학 한 마리 / 孤鶴夜深寒


1572년 기대승이 별세하였을 때 박순은 아래와 같은 만시를 짓는다.  


하늘은 빼어난 풍모 내려 주고 / 天畀英姿秀
사람은 순수한 학업 추앙했네 / 人推學業醇
태고 멀리 희헌을 추구하였고 / 羲軒追古遠
근본 학문 추로를 소급하였네 / 鄒魯泝源眞
외로운 외침 쇠한 시대 슬퍼하였고 / 孤雊傷時溺
올바른 자취 노한 세속에 곤욕 치렀네 / 危蹤困俗嗔
청포(靑蒲) 위에 새 은총 넘쳤으나 / 伏蒲新渥渙
곡구(谷口)에서 예전처럼 안빈낙도 하렸기에 / 耕谷舊棲貧
한강에서 다시금 뱃길을 돌리어 / 江漢重回棹
풍진 속에 두 번이나 몸을 떠났네 / 風塵再去身
한밤중 객창 촛불에 병이 깊어져 / 病淹郵燭夜
새벽녘 노령(蘆嶺) 구름에 시름 보냈네 / 愁入嶺雲晨
성현의 도는 유서가 끊겨 버렸고 / 聖道隳遺緖
청명한 조정엔 철인이 없어졌어라 / 明庭喪哲人
출처의 완전함 평소의 소망인데 / 素期全出處
덧없는 세상 형둔이 있었구나 / 浮世有亨屯
일찍이 우리 서로 마음 맞아서 / 夙昔心相契
세월이 지날수록 교분 두터워 / 星霜分更親
강산에서 함께 놀아 흥을 돋우고 / 溪山俱引興
송죽을 이웃하기로 언약했건만 / 松竹約爲隣
호외의 밝은 가을 달만이 / 湖外三秋月
요서 멀리 만 리에 둥글었다오 / 遼西萬里輪
이별한 지 헤아리면 며칠일런고 / 別離曾幾日
생시나 사시나 눈물만 나네 / 存沒只沾巾

[주D-002]희헌(羲軒) :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와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의 병칭으로 순수한 태고 시대를 상징한다.
[주D-003]추로(鄒魯) : 맹자와 공자의 병칭으로 유학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D-004]청포(靑蒲) : 임금의 침실에 까는 푸른 털자리라는 설이 있으나 그보다는 임금의 침실에 그어 놓은 푸른색의 한계선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황후(皇后)가 아니면 그 선을 넘지 못한다고 하니, 곧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을 말한다. 한 원제(漢元帝)가 병이 들어 태자를 폐하고 정도왕(定陶王)을 세우려고 하자 사단(史丹)이 곧장 임금의 침실로 들어가 청포 위에 엎드리고 간하여 원제의 마음을 돌려 놓았다. 《漢書 卷82 史丹傳》
[주D-005]곡구(谷口) : 지명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한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문신(問神)〉에 “곡구의 정자진은 뜻을 굽히지 않고 암석 아래에서 밭을 갈며 살았는데 그 이름이 경사에 진동하였다.〔谷口鄭子眞 不屈其志而耕乎巖石之下 名震于京師〕” 하였다.
[주D-006]형둔(亨屯) : 형통과 곤액(困厄)을 말한다.
[주D-007]호외(湖外)의……둥글었다오 : 벗끼리 서로 만나 함께 지내지는 못하고 밝은 가을 달이 멀리 만 리를 비추듯이 호남의 고봉과 북쪽의 자신이 마음만 서로 통하였다는 것이다. 삼추(三秋)는 가을 석 달인데, 정든 사람끼리 서로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 《시경》〈왕풍(王風) 채갈(采葛)〉의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삼추처럼 지루하네.〔一日不見 如三秋兮〕”에서 온 말이다.


이런 인연으로 박상(朴祥) · 박순(朴淳)의 위패가 1671년(현종 12) 에 월봉서원에 봉안되었다.


다음은 심의겸에 대하여 알아보자. 심의겸(沈義謙 1535~1587). 그의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간암(艮菴)ㆍ황재(黃齋)이고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이고, 동서분당의 주역으로 서인의 영수이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되었다. 고봉의 벗으로서 1563년 이량의 당 사건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량의 당 사건은 1563년에 명종비 심왕후의 외삼촌이며 효령대군의 5세손 이량의 전횡을 막은 사건이다. 명종은 1559년에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량을 중용하였다. 그런데 이량 또한 전횡을 행사한다. 추종자들만 중용하고 아들을 무리하게 과거에 장원 급제시켜 병조좌랑에 앉히었으며 이를 반대하는 기대승, 허엽, 윤두수 등 신진 사림을 숙청하려 하였다.

   이에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등은 이량을 탄핵하는 글을 명종에게 올린다. 기대항(1519-1564)은 기묘명현 기준의 아들로서 고봉의 사촌형이다. 한편 심의겸은 누나인 명종비 심 왕후을 통하여 이량의 비위를 명종에게 아뢰었고, 명종은 이량을 평안도 강계로 유배 보낸다.  
이 때 기대승은 일시 파직 당한 후에 다시 복직한다.

   1575년(선조 8년)에 일어난 동서분당은 이조정랑 자리를 둘러싼 신진사류와 보수파의 분쟁이다. 서울 동쪽 낙산 밑에 살던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와 서쪽 정동에 살던 심의겸이 이조정랑 추천을 둘러싼 반목 대립이 격화되자 동인, 서인이 되었다. 동인 편에 있는 선비들은 주로 이황의 제자들이었고, 서인은 이이의 제자들이었다. 때로는 영남학파가 동인 기호학파를 서인이라고 구분 짓기도 한다. 심의겸은 이런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박순이 선조시대에 이이와 함께 서인의 영수이었다.

   심의겸은 기대승 생전에 기대승과 호흡이 잘 맞았다. 무척 개혁적이어서 당시의 원로 재상들에게 눈 밖에 나기도 하였다.


  1572년 고봉이 별세하였을 때 심의겸은 병세가 악화된 상태이었다. 그는 조문도 못 갈 정도로 몸이 아팠다. 그도 언제 저 세상으로 갈지 모르겠다고  만시에서 적고 있다. 그가 쓴 제문과 만시를 보자. 먼저 제문이다.


세차 계유년 1월 27일 무신에 벗 첨지(僉知) 심의겸은 멀리서 술과 과일로 삼가 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기공(奇公)의 영전에 제사를 올립니다.

아 애통하오이다 / 嗚呼痛哉
우리 명공께옵서 / 惟我明公
어찌 이리 되었는가 / 何至於斯
사문은 어디에 의탁하며 / 斯文何托
후학은 누구를 의지할꼬 / 後學疇依
백 명으로도 못 바꿀 사람 / 人百莫贖
하늘 어찌 데려갔나 / 天胡不遺
아 애통하오이다 / 嗚呼慟哉
공과 교유한 지가 / 與公交遊
이제 십여 년인데 / 一紀于茲
큰 벼슬 함께 오르고 / 同登顯仕
태평성대를 만나서 / 遭際明時
취향 서로 같으니 / 嗜好之同
출처 또한 함께했지 / 出處之隨
한 백 년을 서로 믿고 / 百年有恃
사우 의리 겸했는데 / 義兼友師
이럴 수가 들보 꺾이어 / 何意樑摧
대도가 무너졌네 / 大道其隳
나의 병이 깊었기에 / 適余病極
공의 부음 들었을 제 / 聞公不醫
소리쳐 곡하지 못하고 / 哭不能聲
눈물만 흘렸다오 / 惟淚之泚
나라엔 이제 사람 없으니 / 國以之空
내 마음이 슬프구나 / 余懷之悲
아 애통하오이다 / 嗚呼痛哉
강루의 그 이별이 / 江樓一別
영원한 이별 될 줄이야 / 詎意長辭
장례 날짜 다가오니 / 禮窆有期
심신이 서글프네 / 心神慽而
사람 보내 제물 올려 / 遠伻薄奠
내 마음을 풀었으나 / 以洩余思
지리한 병상에서 / 支離床席
남쪽 향해 눈물 흘리매 / 南望涕洟
정신 생각 어지러워 / 精思荒亂
두서없는 애사로세 / 未選哀詞
생사가 갈렸으니 / 幽明永隔
따라가기 어렵지만 / 此生難追
느낀다면 통하는 법 / 有感則通
영령 내 마음 아시리 / 靈其我知
아 슬프오이다 / 嗚呼痛哉
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


다음은 심의겸이  쓴 만시이다.



내 병들어 오늘 내일 죽으려 하는데 / 我病方折命
깜짝 놀랐네. 그대가 먼저 가다니 / 驚聞子已歸
정신이 몽롱하여 얼이 빠진 듯 / 精神渾欲喪
이 간담을 누가 다시 알아주려나. / 肝膽更誰知
하늘 뜻을 그 어찌 믿을 수 있나 / 天意嗟何恃
사문(유학)은 이제 영원히 무너졌어라 / 斯文奈永隳
남쪽 향해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 南瞻淚不盡
구천에서 만나기를 기대한다오 / 倘有九泉期


  이어서 김계휘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계휘(金繼輝 1526~1582). 그의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이다. 일찍이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식년 문과에 을과로 입격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1581년(선조14)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오고, 이어서 예조 참판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천ㆍ마을ㆍ도로ㆍ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 현황, 각 지방의 전통ㆍ연혁ㆍ씨족 원류 등을 두루 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김계휘는 고봉의 친한 벗으로서 그가 전라도관찰사 시절에  서원에 전답을 주었다. 그는 예학의 종조인 김장생의 아버지. 김집의 할아버지이다. 이런 인연으로 1673년 김장생과 김집이 월봉서원에 추배되기도 하였다. 한편 김집은 월봉서원 초대 원장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김계휘의 고봉에 대한 제문을 읽어 보기로 하자. 당시에 김계휘의 벼슬은 예조참의였다.



세차 계유년 1월 27일에 예조 참의 김계휘는 삼가 돌아가신 벗 고봉 선생에게 고합니다.
아, 하늘이 사문(斯文)에 화를 내리는 것이 어찌 이리도 혹독합니까. 몇 해 전에는 퇴계 선생께서 돌아가시더니 이제는 우리 명언(明彦)이 또 고인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이 사람을 세상에 냈을 때에는 이 세상을 위한 뜻이 필시 없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이다지도 빨리 빼앗아 간단 말입니까. 옛날 큰 선비로서 장수를 누린 자를 보건대, 어떤 이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여 세도(世道)를 붙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학설을 수립하여 도맥(道脈)을 튼튼히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 그대의 수명은 겨우 46세로, 살아생전에는 이미 세상에 크게 쓰여 가슴속에 축적한 경륜을 펴 보지도 못했고 죽어서는 또 저술을 남겨 뒷사람의 길잡이가 됨도 없으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풍부함에도 베풀어 쓴 것은 이처럼 적단 말입니까. 죽음과 삶, 장수와 요절이 한 번 오고 한 번 가는 그 사이를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른바 현명하고 어리석음과 선하고 악함이란 다 사람이 억지로 붙인 이름일 뿐 하늘은 실제로 화를 내리고 복을 주는 것에는 무관한 것인지, 저 푸른 하늘은 참으로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은 성리(性理)의 학문에 어두워 진정 그대가 나아간 경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한 시대 유림의 종장(宗匠)으로서 도학의 종통을 그대에게 맡겼고,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가면서 성상을 면대하실 때 유독 그대만을 추천하면서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조정에 들어와 남에게 시기를 받는 것은 참으로 선비에게 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학문을 좋아한다는 이 이름표는 참소하는 자의 표적이 되는 것이기에 우리 동방의 여러 원로 선생들이 모두 여기에 걸려 큰 화를 면치 못하셨으니, 우리 그대가 자주 황급하게 오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원수 사이일지라도 감히 비난하지 못할 점이 있으니, 그대의 숙속(菽粟) 같은 문장입니다. 요즘에 지으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비문(碑文), 지문(誌文), 행장(行狀)은 또한 그 솜씨를 빌려 고인(古人)에게 보이더라도 충분히 부끄러움이 없을 만합니다. 그 다음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반기는 정성은 역색(易色)의 정도만이 아니었으니, 배우는 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추앙한 것이 어찌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보다 못하였겠습니까.

나는 천품이 혼매하고 또 도를 배운 것도 독실하지 못하여 반평생 동안 벗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는데, 오직 그대가 문회(文會)의 일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대의 언론을 듣노라면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가 유장하게 흘러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서 가슴속에 맺힌 답답함이 봄날의 얼음처럼 시원하게 녹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직함과 진실함과 넓은 식견,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춘 자는 참으로 성인께서 말씀하신 유익한 벗입니다. 옛사람이 “도가 쇠잔해진 세상에 태어났지만 유감이 없는 것은 오직 아무개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먼저 한 것입니다.

아, 한강변 객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더디 더디 조정을 떠날 때 나는 그래도 벗을 아끼는 마음에, ‘초야에 편히 누워 있더라도 충분히 많은 선비의 모범이 될 것이고, 또 혈기 가운데 치우친 부분을 전부 변화시켜 그 덕업(德業)을 더 높이고 넓힐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길로 영영 유명(幽明)이 갈라질 줄 알았겠습니까. 그날 작별할 때의 음성과 모습이 아직도 마음에 아른거리고 눈에 선하니, 흉금은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얼굴빛은 지는 달처럼 쓸쓸하였습니다. 아, 벗이여 가신 그대를 다시는 살릴 수 없겠지요. 우리 도를 위하고 이 세상을 위하여 슬퍼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천 리 멀리 제문을 보내어 나의 사적인 슬픔을 곡합니다.


[주D-002]숙속(菽粟) 같은 문장 : 평범하면서도 맛이 깊고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말한다. 《송사(宋史)》 권127〈정이열전(程頣列傳)〉에 정자를 찬미하여 “그 말씀의 아름다움이 포백과 숙속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 하였다. 포백은 삼베이고 숙속은 곡물이다. 삼베와 곡물은 비단과 고기에 비하면 하찮아 보이지만 일상생활의 필수품이므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일견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
[주D-003]역색(易色) : 이성을 사랑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어진 이를 존경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표현이다. 《논어》〈학이(學而)〉의 “어진 이를 존경하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한다.〔賢賢易色〕”는 말에서 나왔다.
[주D-004]태산북두(泰山北斗) : 태산처럼 높이 숭앙하고 북두칠성처럼 우러러 존모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가 죽고 난 뒤 학자들이 그를 태산과 북두성처럼 우러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76 韓愈列傳》
[주D-005]구양수(歐陽脩) : 1007~1072.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구양수는 10세 때 한유의 문집을 읽고 매료되어 서곤체(西崑體)가 유행하던 송나라 초기의 문단을 혁신한 송나라의 대표적 문학가이다. 저서에 《신오대사(新五代史)》, 《신당서(新唐書)》, 《모시본의(毛詩本義)》 등이 있다.
[주D-006]문회(文會) : 《논어》〈안연(顔淵)〉의 “군자는 문(文)으로 벗을 모은다.〔君子以文會友〕”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문인의 모임을 가리킨다.
[주D-007]정직함과……벗 : 고봉이 김계휘(金繼輝) 자신에게 유익한 벗이라는 뜻이다. 《논어》〈계씨(季氏)〉에 “유익한 세 가지 유형의 벗이 있고 해로운 세 가지 유형의 벗이 있는데, 정직한 벗을 사귀고 진실한 벗을 사귀고 식견이 많은 벗을 사귀면 유익할 것이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하였다.
[주D-008]옛사람이……하였는데 : 퇴계가 고봉을 두고 한 말이다.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1558, 명종13)에 내가 서울에 들어간 것은 몹시 곤혹스러운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高峯集 附錄 諡狀, 韓國文集叢刊 40輯》


한편  정철(鄭澈 1536~1593)과 고봉과의 인연은 이미 글을 쓴 바 있어 생략한다.


  월정서원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서원이 너무 방치되어 있음에 씁쓸함을 느낀다.  박순, 심의겸등 조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비요, 서인의 영수들이 이처럼 대접을 못 받고 있어 안타깝다. 문화유산 관리는 관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우선에 1000년 고도 古都를 자랑하는 나주시가  관심을 보여주기 바란다. 문화유산은 문화관광의 콘텐츠이고, 지역발전에 상당한 도움이 됨을 다시금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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