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1회 호기(豪氣)의 선비, 금호 임형수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1회 호기(豪氣)의 선비, 금호 임형수

- 광주 등임사

 

김세곤 ( 호남역사연구원장 )

 

영조 시절 호남양전사 원경하(1698~1761)는 영조에게 호남의 인물을 등용하여 달라는 상소를 한다. 이 상소문에는 광산의 인물이 여러 명 나온다. 기대승과 박상, 그리고 임형수가 그러하다.

 

아! 기대승 · 김인후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 · 고경명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 · 박상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의 공적, 김덕령의 용기, 임형수 · 임제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영조실록 1747년 10월 2일)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8-1618)의 '성옹지소록'에도 광산의 인물들 즉 임형수, 박상, 박순, 양응정, 기대승이 등장한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눌재 박상과 육봉 박우 형제, 사인(舍人) 최산두, 미암 유희춘과 유성춘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삼재(三宰) 송순, 찬성(贊成) 오겸 같은 사람은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사암 박순, 일재 이항,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림동 내동마을에 있는 등임사 登臨祠는 호걸중의 호걸 임형수(林亨秀 1514-1547)를 모신 사당이다. 임형수는 자 字가 사수(士遂), 호 號는 금호(錦湖)로서 나주에서 태어났다. 1535년, 나이 2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시강원 설서,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39년에 대제학 양곡 소세양이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모실 때 그는 소세양의 종사관이 되어 함께 사신을 모셨는데, 시문에 능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임형수는 풍채가 좋고 문장도 뛰어나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여 사람들이 나라의 그릇이라 칭송하였다.

 

그 해 7월에 임형수는 회령판관으로 나가게 된다. 회령은 함경도 두만강 변으로서 여진족과 접하고 있는 변경이다. 당시 북쪽지방은 연이은 기근과 일부 수령들의 횡포가 커서 백성들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한 인재가 필요했던 바, 중종임금은 임형수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임형수를 회령판관으로 보내는 것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를 아끼던 소세양은 임금에게 그를 보내지 말것을 간언하였다. 그러나 금호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한결 같았다. “이 사람은 문무가 뛰어나니 내가 변방에 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임형수가 부임지로 떠나던 날, 많은 조정 대신들이 흥인문(동대문) 밖에 나와 전송하였다. 당시 그에게 전별시를 써 준 사람은 김안국 ․ 김정국 ․ 소세양 ․ 신광한 ․ 홍섬 ․ 송순 ․ 노수신 등이며, 송순의 '면앙집'에는 ‘회령판관으로 떠나는 임형수를 보내며’ 란 시가 전해진다.

 

임형수는 회령에 가서 호방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그는 때로는 2일 분을 한꺼번에 먹기도 하고, 혹은 하루에 여러 사람의 밥을 겸하여 먹기도 하며 말하기를, ‘장수된 자는 이러한 습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변경의 되놈을 어루만져 편하게 해 주어서 심복하였다. - '해동잡록'에서

 

이 시절에 임형수는 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라는 의미. 강계의 만포진에 있다.) 시를 지었는데 허균의 '국조시산'에 실려 있다.

 

취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물소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지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을 건넜더니 칼과 창이 울었지.

 

변새풍 邊塞風의 호탕한 풍격의 시이다.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

 

임형수가 회령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중종은 매우 흡족해 하면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1543년 12월26일의 중종실록에는 중종이 임형수의 자급을 9등급이나 높여주려 하자 사헌부가 전례가 없다며 이의를 제기한 기록이 있다. 주1)

 

중종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2등급만 올리고 목사 ․ 부사로 제수하도록 하는 이조의 건의를 따랐다.

 

중종의 임형수에 대한 이런 총애는 나중에 조정 관료들의 은근한 시기와 질투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545년 7월에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부제학 임형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다툼이 있었을 때 임형수는 그의 아우에게 윤원형 형제를 가리켜 ‘만약 한 두 사람만 곤장을 친다면 곧 진정시킬 수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윤원형 무리에 들어갔다.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동생이고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실세가 되었고, 임형수에게 보복을 한 것이다.

 

이 당시에 임형수는 승하한 인종 임금의 산릉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종에 대한 만시를 쓴다.

 

하늘이 사문(斯文 유학자)을 없애고자 하니

신이 어찌하여 이런 때를 만났을까

오늘의 눈물을 가지고

작년의 수건을 거듭 적십니다.

 

평생의 뜻을 본받아 보은을 갚고자 하나

울부짖되 죽지 못한 몸입니다.

산릉의 준공을 보지 못한 채

남쪽 나라로 자리 옮김을 진실로 슬퍼합니다.

 

한편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 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주고 이었다.

"자 어서 드시지요. 부제학." 두주불사의 주량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 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

 

1547년 9월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다. 주2) 임형수는 윤임과 가까운 사람으로 지목되어 제주목사 자리에서 파직된다. 며칠 후 벽서사건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이 다시 상소한다. 임형수를 너무 가볍게 처벌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사약을 받는다.

 

1547년 9월21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임형수는 그때 파직되어 집에 있었는데, 죽을 적에 부모에게 절하고 그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하고, 다시 말하기를, ‘무과일 경우는 응시해도 좋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유분록'에는 금호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아니하자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죽지 않아, 목을 졸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임형수는 시문 詩文에도 뛰어 났다. 1537년에 중종이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일을 시찰하고 망원정에서 시 한 편을 짓게 했는데, 병조판서 소세양이 1위를, 임형수가 2위를 하여 사서삼경과 말 1필을 하사 받을 정도로 문예가 뛰어났다.

 

그의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이나 '성수시화'에 실릴 정도로 걸작이었다. 허균은 금호의 호방한 시를 칭찬하면서 그가 원통하게 일찍 죽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주3)

 

임형수는 풍류가 호일하고 그 시 또한 펄펄 나는 듯하였다.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미인의 얼굴이요./ 花低玉女酣觴面

끊어진 산은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 山斷蒼虯飮海腰

 

이 시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퇴계 선생이 그를 몹시 사랑하여 만년까지도 문득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면 임사수와 더불어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 '성수시화'에서

윤근수는 '월정만필'에서 임형수의 호방함과 퇴계 이황(1501-1570)과의 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주4)

 

임형수는 너무 일찍 과거에 올라 갑작스럽게 화려한 벼슬을 지냈다. 성격이 호방하여 얽매임이 없었으므로 호기를 부려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아 아무리 선배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거만한 말로 대하였는데, 다만 이황만은 존경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신잠이 그린 대나무 그림에 금호 임형수가 지은 시는 이렇다. 주5)

 

영천(靈川)의 붓으로 그린 푸른 대나무 그림에는

소상강 어귀의 높은 지조가 눈과 달빛 속에 차구나

시인을 골라 보면 누가 이와 비슷할까

맑고 수척한 모습, 마땅히 퇴계와 함께 보리라.

 

이렇듯 임형수는 퇴계를 존경하는 태도가 극진하였다.

 

한편 호걸 임형수는 죽어서도 일화를 남기고 있다. 먼저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지사 강섬(姜暹)이 명나라 서울을 가다가 명나라에 공문을 바치러 가는 되놈을 만났는데 거의가 우리나라와 가까이 지내는 자들이었다. 우리 통역에게 물어 보기를, “너의 나라에 임형수란 이는 지금 잘 있느냐?” 하니,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되놈들은, “임형수란 분은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너의 나라에서 이 사람을 죽였다기에 그 사실 여부를 물어본 것이다” 하니, 통역은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야담집 '기문총화'에는 주인의 원수를 갚은 말 이야기가 있다.

 

임형수를 모함하여 죽게 한 정언각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렸는데 말이 마구 날 뛰면서 걷어차서 크게 다치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통쾌해하고 하늘이 아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탔던 말이 바로 임형수가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이었다.

 

도덕과 절의와 문장의 선비 하서 김인후(1510-1560)는 임형수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조를 지었다. 주6)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바티리.

 

임형수의 신위는 나주시 문평면 송재사에도 배향되어 있다. 나이 33세에 희생당한 동량재 금호 임형수. 그는 정녕 문무를 겸비한 호걸 중에 호걸이었다.

 

 

주1) 중종 101권, 38년(1543 계묘 / 명 가정(嘉靖) 22년) 12월 26일(병신) 2번째 기사

 

사헌부가 임형수의 일을 아뢰다

 

사헌부가 임형수(林亨秀)의 일을 아뢰니, 답하였다.

“임형수의 일을 내가 망설이는 것은 그가 쓸만한 사람이어서 발탁하였으면 한때 아뢰는 것에 따라 문득 체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니, 인물이 쓸만하더라도 아홉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당상(堂上)이 되는 것은 근래에 보지 못하던 일이므로 정청(政廳)(이조(吏曹)) 에 의논하라고 이미 분부하였으니, 정사(政事)하는 날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주2) 1547년 9월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은 운원형 일파가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는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극이다.

이 사건은 척신 계열인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 임형수를 사사(賜死)시키고 ,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정유침(송강 정철의 부친), 권벌 등 수십 명을 귀양 보낸다.

 

 

주3) 한편 허균은 <학산초담>에서도 임형수의 시를 칭찬하고 있다.

 

누제(樓題)에도 좋은 시구가 또한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북변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谷口驛)에 이르니, 임형수(林亨秀)가 지은 시의 항련(項聯)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 花低玉女酣觴面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山斷蒼虯飮海腰

하였다.

 

시어(詩語)가 청절(淸絶)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임형수의 자는 사수(士遂)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평택인(平澤人)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주4) 월정만필은 월정 윤근수(1537-1616)이 지은 것으로, 윤근수가 보고 들은 명사들의 시문과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주5) 신잠(申潛 1491-1554)은 신숙주의 증손자로서 호가 영천자이다. 1519년 현량과에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로 있다가 1521년 10월 신사무옥에 휘말리어 장흥에 유배되었다.

 

그는 다시 경기도 아차산 근처로 이배되어 20년 가까이 유배를 살다가 복직되었다. 이후 그는 태인 현감(1548년), 상주 목사(1552년)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신잠은 시를 잘 짓고 행서(行書)를 잘 쓰며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주6) 임형수는 나이 22세에 독서당에 들어가 김인후, 이황, 나세찬등과 인연을 맺었다. 이황과 임형수와의 세한 인연은 이상하의 저서 <퇴계생각>에 자세히 나와 있다.

 

 

<참고문헌>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o 민병수 외, 사찰, 누정 그리고 한시, 태학사, 2001

o 이상하, 퇴계 생각, 글항아리, 2013

o 윤근수, 월정만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고전번역서)

o 허균, 성소부부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고전번역서)

 

 

댓글 (0)    댓글쓰기
  • 이전글 다음글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