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12회 고봉기대승과 하서 김인후, 일재 이항과의 만남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 2부 제12회  고봉 기대승과  하서 김인후, 일재 이항과의 만남  -  고봉과 일재 그리고 하서의 태극논쟁


   1558년  7월 기대승은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면서 장성 백화정에 사는 하서 김인후를 찾아뵙고 나서 전라북도 태인현(지금의 정읍시 태인면)에 들러 일재 이항을 뵈었는데 두 사람간의  대화가 우연히 태극의 이론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논의를 하루 종일 하였지만 견해가 달랐다. 그 해 겨울에 고봉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항을 만나 논쟁을 하였으나 견해는 전과 같았다.

   기대승은 ‘태극은 음양이 섞이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일재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지 정밀함과 거침, 근본과 말단에 있어 구분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 뒤에 고봉은 하서를 찾아뵙고 그 이론을 물었는데 하서의 뜻은 고봉과 같았다. 즉 ‘도와 그것을 담은 그릇의 구분에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태극과 음양은 하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하서의 아들이자 일재의 사위인 김종룡이 일재에게 두 사람의 대화를 전하였다. 이에 일재는 하서의 하인을 통하여 고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하서가 이 편지를 중간에 뜯어보고, 짧은 편지 한통을 일재에게 보냈으며, 하서는 일재의 편지와 하서가 일재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고봉에게 전해주었다.

이후 일재는 고봉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으며  고봉 또한 답을 하였다.

고봉은 퇴계에게 태극논쟁에 관하여 그간에 오고 간 편지를 보내고 그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하여 퇴계는 호남의 인물들이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주자학 논의를 하는 일에 대하여 깊이 감탄하고 흠모하면서  고봉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자세한 한 것은 퇴계와 고봉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 있다.)

여기에서  하서 김인후(1510-1560)와 일재 이항(1499∼1576)에 대하여 알아본다.

하서 김인후 金麟厚 (1510-1560).  자는 후지 厚之, 호는 하서 河西 · 담재澹齋이고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호남의 대 선비이다. 호남 선비로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그는  장성에서 태어났는데  김안국, 최산두에게 글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나서 조광조의 삼촌 조원기, 기대승의 삼촌 기준등을 만나 칭찬을 들었다. 1531년(중종 26)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호당 湖堂에 들어가 이황, 나세찬, 임형수등과 함께 사가독서 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인 인종을 가르쳤고, 홍문관부수찬에 이르렀다. 1545년 7월에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옥과 현감 자리를 사직하고 귀향하여 평생 초야에 묻히었다.  하서는 학문과 출처를 모두 갖춘 학자이었고 1,600수에 이르는 시를 썼다.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자연가등이 대표 시 이다. 저서로 <하서집> <백련초해>등이 있다.

하서와 고봉과는 인척간이다. 고봉의 딸이 하서 손자 남중의 부인이다. 하서는 1560년 1월에 별세한다. 1560년 8월8일자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는 하서의 별세에 대한 글이 적혀 있으며, 퇴계는 9.1자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서에 대하여 조의를 표한다. 즉 퇴계는 “김 하서는 성균관과 홍문관에서 같이 지낸 적이 있었는데, 처음 공부에 들어간 곳이 대부분 노장 老莊이어서 한창때에 시와 술로 몸가짐을 흐트러뜨린 것이 애석하다고 하면서, 그런데 듣자니 늘그막에 우리 학문에 뜻을 두었다하고 학문을 논한 글을 보았더니 정밀하여 탄복하였는데 갑자기 고인이 되었다니 비통하다.”고 적고 있다.  

하서 김인후의 흔적은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과 황룡면 맥동마을의 백화정, 난산 통곡비, 신도비와 하서 묘소, 그리고 고봉 딸 기씨 부인의 팔뚝 무덤 등 여러 곳에 있다.

  그러면 일재 一齋 이항(李恒 : 1499∼1576)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산 아래에 일재 一齋라는 정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한 학자이다. 처음에는 무신이었으나 뒤늦게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40세인 1539년부터 조상의 토지가 있는 태인현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학업에 매진하였다. 1558년 7월 고봉과 태극논쟁을 벌였고 그의 제자는 김천일, 최경회, 황진, 고종후, 김점등이다.  

  정읍시 북면의 남고서원에 그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고 칠보산 보림사에는 그가 강학하던 바위가 있다.  저서에 《일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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