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11회 식영정에서 - 고봉 기대승과 제봉 고경명의 만남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 2부) 제11회 식영정에서 -고봉 기대승과 제봉
           고경명의 만남  

                                      
꿈에 퇴계 선생을 뵙다.

지난밤에 어렴풋이 스승을 모시었고 / 前夜依俙杖屨陪
오늘 밤에도 정답게 웃고 말씀하시었네. / 今宵款曲笑談開
분명한 생각으로 아직도 세상 걱정하시니 / 分明一念猶憂世
선생께서 매화에만 집착 않으심을 알 수가 있네. / 可識先生不著梅

선생께서 일찍이 “도산{陶山]의 매화가 아직 피지 않았지만 지금쯤은 필 때가 되었다.”고 하시기에, 대승{大升}이 말하기를 “산림{山林}에 집착하시는 것도 성곽{城郭}에 집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하고, 서로 우스개 소리하며 웃은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끝 구절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원주]

  1569년 봄 기대승은 퇴계 선생과 헤어진 후 꿈에서 자주 퇴계 선생을 뵙는다. 광주로  낙향하여 살면서 생각하니 퇴계 선생이야 말로 자기를 가장 아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어서일까. 고봉은 퇴계와 이별한 후로 자주 꿈속에서 퇴계를 뵈었고, 퇴계를 생각하며 위 시를 지어 그에게 올린다.

  그런데 1570년[선조3년] 12월 8일, 조선 유학의 수퍼스타 퇴계 이황은 경상도 안동의 도산에서 별세한다. 매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한 그는 죽기 전에 '내가 설사를 하여 저 매화에게 미안하다. 다른 곳으로 치우라.’는 말을 유언인양하면서.

   고봉은 광주에서 퇴계의 별세 소식을 접한다.  그는 사람을 보내 조문을 하면서 제문을 쓰고 만장을 짓는다. 그가 쓴 제문에는 퇴계 선생을 잃은 비통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아, 애통합니다. 대들보가 꺾이고 태산이 무너졌으니, 제가 다시 어떻게 가슴을 가누겠습니까. 위로는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짐을 애도하옵고, 아래로는 만학{晩學}이 의지할 곳을 잃음을 슬퍼하오니,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뼈가 놀라고 혼이 날아가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어찌 인간의 일을 기약할 수 없어서 갑자기 부음{訃音}을 받는단 말이옵니까. 애통하여 사모하면서 길이 울부짖으니, 가슴은 답답하고 답답하여 더욱 서글퍼집니다.

천리 먼 길에 애도하는 말을 엮어서 한 술잔에 부치오니, 애통하여 저의 정을 다할 수 없사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생의 영령께서는 행여 저의 작은 정성을 굽어 살피소서. 아, 애통하옵니다. 흠향하소서. < [제문]에서 >

  1571년[선조 4년] 3월 21일 퇴계 이황의 장례가 있던 날, 고봉은 멀리서나마 인사를 하려고 한 것인지 여러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 규봉에 올랐다. 이 날 고봉은 ‘퇴계 선생의 장례날에 문수암에서’[원제는 ‘느낌이 있어 (감흠 感欽)’이다]란 시 세수를 짓는다.


선생은 세상이 싫어 백운향에 가셨는데
천한 제자는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멀리서 생각하니 오늘 무덤에 묻히실 텐데
사방의 궂은 안개가 차츰 아득해지네.
                      
先生厭世白雲鄕        선생염세백운향
賤子含哀在一方        천자함애재일방
遙想佳城今日掩        요상가성금일엄
四山氛霧轉茫茫        사산분무전망망

백운향은 장자의 [천지]에 나오는 글이다. ‘저 흰 구름 타고 상제의 고을에서 놀리라’라는 구절이 나오는 데 흰 구름 타고 가는 고을이 바로 백운향이다.

한 기운이 유유하게 갔다가 돌아오니
화려한 집에서 황천으로 떨어짐을 어찌 견디랴.
산머리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속이 아프니
쇠약한 몸 백발 여생이 외로워졌네.

一氣悠悠往又回      일기유유왕우회
可堪華屋落泉臺      가감화옥낙천대
山頭不覺中心痛      산두불각중심통
衰白餘生踽踽來      쇠백여생우우래


병이 많아 근년에는 몸조심을 하니  
우연히 봄빛 따라 선방에 이르렀네.
우리 도학이 땅에 떨어짐을 상심하노니
누구를 공경하며 다시 향기 기를꼬.

多病年來效括囊     다병연래효괄랑
偶隨春色到禪房     우수춘색도선방
傷心吾道今墜地     상심오도금추지
敬爲何人更畜香     경위하인갱축향


한편 이 시에는 원주가 달려 있다.

1571년  3월 21일에 고봉 기대승은 무등산{無等山} 규봉{圭峯}의 문수암 {文殊菴}에서 쓰다. 이날 퇴계 이황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느끼는 바가 있어서 우연히 이 시를 썼다. [원주]

  문수암은 지금은 무등산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제봉 고경명[1533-1592]의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문수암 기록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규봉] 광석대의 서쪽 길에는 문지방 같은 돌이 가로질러 있는데 이들을 넘나들면 문수암이다. 암자 동쪽 기슭에 오목하게 패인 돌이 들어 있어 그 중앙에서 샘이 솟아나오며 돌 틈에는 석창포가 수북이 피어 있고 그 앞에는 높이와 넓이가 수십 척 되는 바위가 있다


이 날 무등산 규봉에 오른 고봉 기대승은 제자들과 함께 그날 밤을 담양 식영정에서 보낸다. 그리고 고봉은 식영정에서 제봉 고경명을 만난다. 이 당시에  고경명은 파직되어 광주에서 벼슬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에 대하여 알아보자. 1592년 7월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순절하였다. (중략)
처음에 임금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중략)

   고경명의 자 字는 이순 而順, 호 號는 제봉 霽峯이다. 풍류와 문채는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였으며 중년에는 벼슬길이 막혔으나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리에 임해서 절개를 드러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일찍 기용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는 시 詩의 대가大家로 불리었으며 유고 遺稿가 세상에 전한다.

  그는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기묘명현 고운이고 부친은 대사간 고맹영, 장인은 김백균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시문에 능하여 임억령, 정철, 김성원과 더불어 식영정 사선으로 알려졌다. 식영정과 면앙정, 소쇄원에는 그가 지은 시가 걸려 있다.  

    고경명은 1558년 26세의 나이에  문과 갑과에 장원 급제한다. 이어서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공조좌랑 등을 거쳐 명종의 총애를 받는다. 그는 시문으로 널리 조정에 이름을 날린다.

  호사다마라 할까. 그는 1563년 이량 사건으로 울산군수에서  파직 당한다. 이량은 효령대군의 5세손이며 명종 비 심왕후의 외삼촌이다. 명종은 1559년에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량을 중용하였다. 그런데 이량 또한 전횡을 행사한다. 추종자들만 중용하고 아들을 무리하게 과거에 장원 급제시켜 병조좌랑에 앉히었으며 이를 반대하는 기대승, 허엽, 윤두수 등 신진 사림을 숙청하려 하였다.

   이에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등은 이량을 탄핵하는 글을 명종에게 올린다. 기대항(1519-1564)은 기묘명현 기준의 아들로서 고봉의 사촌형이다. 이 탄핵 논의 자리에 홍문관 교리 고경명도 참가하였다. 그런데 고경명은 이 사실을 장인 김백균에게  알리었고 김백균은 이량에게 말한다. (이 사실은 명종실록 8월 19일 기사에 나온다.) 한편 심의겸은 누나인 명종비 심 왕후을 통하여 이량의 비위를 명종에게 아뢰었고, 명종은 이량을 평안도 강계로 유배 보낸다. 이량의 당이었던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과 아버지 고맹영도 파직이 된다. 고경명은 탄핵 논의 누설 혐의로 1563년 11월 울산군수에서 파직된다. 그리고 1581년까지 출사의 길이 막힌다.

1571년 3월  식영정에서 만난 고봉과 제봉 두 사람은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서로 어긋난 인연을 토로하면서 회포를 푼다. 그리고 고봉은 시  3수를 짓는다. 이 시는 고봉집에 실려 있다.

식영정(息影亭)에서 술 취한 후에 고제봉(高霽峯)과 김상사 경생(金上舍景生)과 더불어 운자를 부르다 (김성원(金成遠)의 정자 오언 사운 3수)

물 밖에는 정 다하기 어려운데 / 物外情難盡
인간에는 일이 혹 어긋나네. / 人間事或乖
술상은 손님과 주인이 함께 하고 / 杯盤賓主共
예 이제의 이야기 함께 했노라 / 談笑古今偕
술잔은 기울이면 기쁘고 / 酒味傾還喜
노래 소리는 아름답네 / 歌聲聽卽佳
성산의 오늘 밤 모임에서 / 星山此夜會
백년의 회포 풀어 보리라 / 消遣百年懷


서석산 겨우 탐승하니 / 瑞石纔探歷
소나무 사이에 뜻이 어울리네. / 松間意不乖
술 많으니 정 스스로 방랑해지고 / 酒多情自放
괴롭게 읊으니 웃음과 함께 했네. / 吟苦笑兼偕
젓대소리 바람 앞에 좋고 / 長笛風前好
등잔불 밤 되니 아름다워라 / 華燈夜亦佳
연하 속에 하룻밤을 자고서 / 棲霞成一宿
날이 새어도 남은 회포 있네. / 明發有餘懷

밤 빛은 깊을수록 좋은데 / 夜色深深好
지나간 말은 일마다 어긋났네. / 往言事事乖
술이 오면 일찍이 사양하지 아니하고 / 酒來曾不讓
취해 갈 때는 진작부터 능히 함께 하네 / 醉去宿能偕
무르익은 정 어찌 끝이 있을까 / 爛爛情何極
서로 따르는 뜻 다시 아름다워라 / 追隨意更佳
바람과 내 골짝에 가득하니 / 風煙迷洞壑
봄 술로 그윽한 회포 보내리라 / 春酌遣幽懷


   이로부터 1년 후인 선조 5년 (1572년)에 고봉 기대승은 별세한다. 반면에 제봉 고경명은 한동안 힘들었지만 1581년에 영암군수가 되어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1591년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광주에서 지낸다.

   그런데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60세의 노장인 그는 분연히 두 아들과 함께 의병으로 나선다. 의병장 고경명은 호남의 선비들에게 조선을 위하여 싸우자고 격문을 보낸다. 이 격문이 오늘날까지도 일부 식자층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마상격문 馬上檄文’이다. 이 격문은 최치원의 ‘황소격문 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 出師表’와 함께 3대 격문에 들어갈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옷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서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마상격문은 광주, 남원, 전주, 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선비들의 심금을 울려 6천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그는 1592년 7월에 금산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그리고 그는 만고의 충신으로 지금도 광주 남구에 있는 포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 2010. 4. 29  작성 )


첨부파일 |
고봉_2부_11회.hwp
댓글 (0)    댓글쓰기
  • 이전글 다음글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