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10회 식영정에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 2부> 10회, 식영정 에서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성산 마을에 있는 식영정을 간다. 식영정은 광주에서 광주호를 지나 소쇄원을 가는 길목에 있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김성원은 이 정자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 棲霞堂’이라는 집을 지었다. ‘서하 棲霞’는 ‘노을이 깃을 들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김성원(1525-1597)은  환벽당 주인 사촌 김윤제의 조카이고 임억령의 사위이다.  그는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 <성산별곡>의 서하당, 식영정 주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산별곡 첫 머리에 나오는 은자 隱者가 바로 김성원이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돌계단을 올라서 식영정 息影亭으로 간다. 올라가는 계단 주변에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식영정 앞에는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가 보이고 왼쪽에는 무등산 서석대가 있다. 원래 정자는 앞이 툭 트이고 뒤에 산이 있는 곳에 짓는 것이 제격이라는 데 식영정은 바로 그런 곳에 위치하여 있다.

언덕 한 끝에 있는 정자 마루에 오른다. 마루 위 벽에는 식영정이라고 써진 전서 글씨와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기 息影亭記>, 그리고  <식영정 20영> 편액, 송강의 <식영정 잡영 10수>, 고경명과 김성원의 <식영정 20영> 한시 편액이 있다.


<식영정기>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이 글은 석천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의 그림자 쫒기 글은 장자의 기품이 가득하다.


김군 강숙(剛叔: 김성원의 자)은 나의 친구이다. 창계의 위 쪽 우거진 솔숲 아래의 한 기슭을 얻어,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다. (중략) 이 정자를 나에게 휴식할 곳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숙이 정자 이름을 지어 주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장주(莊周 ; 장자의 이름)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장주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달아나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달아나면 천천히 쫓아와서 끝끝내 뒤만 쫓아다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너무나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략)


‘그림자도 쉬고 있는 정자’(식영정)란 이름은 단지 서정적인 뜻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거기에는 은둔과 조화와 순리의 동양사상, 다시 말하면 노자와 장자의 자연론이 담겨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식영정 주인 임억령에 대하여 살펴보자. 석천 임억령 (林億齡1496-1568)은 시문에 뛰어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해남 동문 밖 해리에서 태어났다. 석천 石川이란 호도 그가 태어난 마을의 개울 이름이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이름 중에 마지막 글자 령은 문중의 항렬이고, 가운데 글자는 대망을 의미하는 숫자인 천, 만, 억, 백, 구를 얹어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라 하였다. 셋째인 억령은 부친을 여윈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눌재 박상(1474-1530)의 제자가 된다. 이 때 동생 임백령도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박상은 억령에게는 장자를 읽으라고 하면서 ‘너는 문장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백령에게는 논어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족히 나랏일을 담당할 것’이라 하였다.

어릴 적에 석천은 벼슬에 별 뜻이 없었다. 30살이 된 1525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1544년에는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1545년)때 그는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이 윤원형 일파가 되어 윤임등 대윤의 선비와 사림들을 추방하는 횡포 등을 보고 자책감을 느껴 벼슬을 사퇴하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임백령은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 (2001. 2월-2002.7월 방영)에서 기생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사랑싸움을 벌인 사람이다. 야사에 의하면 임백령은 윤임이 그의 정인 情人 옥매향을 소실로 삼은 것에 울분을 느껴 을사사화 때 윤임에게 복수를 했다 한다. 임억령은 동생 임백령이 을사사화 직후에 은전을 제안하였으나 사양을 하고 형제간의 절의도 끊은 지조 있는 선비였다.

한편 임억령은  명종 때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강원도 관찰사, 담양부사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가 담양부사를 한 것은 62세인 1557년이다. 3년 후에 그는 담양부사 직을 사직하고 담양 성산 星山 아래 식영정 息影亭 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 이 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다. 특히 석천과 하서, 고봉과 송천을 성산 사선 四仙이라 하였고,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식영정 사선이라 하였다.

<식영정 20영>은 식영정과 성산 근처의 이름난 20가지 풍광을 시로 쓴 것이다. 그것은 서석한운 瑞石閑雲, 창계백파 蒼溪白波, 벽오양월 碧梧凉月, 조대쌍송 釣臺雙松, 환벽영추, 노자암 鰲伸巖, 자미탄 紫薇灘, 도화경 桃花徑, 부용당 芙蓉塘, 선유동 仙遊洞등 20개로서 석천 임억령이 먼저 시를 짓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이 그 시를 20수씩 차운하여 도합 80수가 전해진다.

그러면 고봉 기대승의 시를 감상하여 보자. 그가 쓴 시는 오언사운 5수와  오언사운 2수가 있다. 이 시의 운은 모두  정 亭, 성 , 정 庭, 경 扃’이다.


식영정의 시에 차운하다〔次息影亭韻〕 오언사운 5수

1.
  옛날에 석천노인(임억령을 말함) 찾아뵙고 / 昔拜石川老
  소나무 밑 정자에서 배회했노라 / 徘徊松下亭
  인간 세계는 헌신짝인 양 벗어던지고 / 人間猶脫屣
  하늘 위에선 스스로 별을 타리라 / 天上自騎星

  석양에 구름은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 落日雲生峀
  가을바람에 지는 잎 뜨락에 가득하구나. / 秋風葉滿庭
  그대를 만나 좋은 경치 이야기 들으니 / 逢君言勝槩
  나도 그윽한 곳 찾아보고 싶구나. / 吾欲款幽扄

2.
  식영이란 본래 지음이 없는 것인데 / 息影初無作
  높은 곳 의지해서 정자 만들었구나. / 憑高更製亭
  뭇 산은 떨어지는 해를 받들고 / 衆山擎落日
  한 줄기 물은 별빛을 띠었네. / 一水帶飛星

  비 그친 후 이끼는 대밭에 이어지고 / 雨罷苔連竹
  봄 깊으니 새가 뜨락에 내려오네. / 春深鳥下庭
  소요하며 스스로 뜻을 얻어 / 逍遙自得意
  부질없이 사립문을 다시 닫았노라 / 空復掩柴扄

3
  서하 속에 살 집 한 채 마련하매 / 棲霞成一室
  식영이란 외로운 정자 있도다. / 息影有孤亭
  구부리고 우러르며 하늘과 땅을 보고 / 俯仰看天地
  행하고 감춤은 해와 별에게 묻는다. / 行藏問日星

  뽕나무와 삼대는 오솔길 가리고 / 桑麻翳幽徑
  참새 떼 황량한 뜨락에 지저귄다. / 鳥雀噪荒庭
  적막한 곳에 어떤 사람 찾아올까 / 寂寞何人到
  소나무 사립문 스스로 닫고 있네. / 松關只自扄

4.
  나의 벗 김강숙(강숙은 김성원의 자이다)이 / 吾友金剛叔
  소나무 사이에 초정을 지었구나. / 松間作草亭
  마을 이름은 지금 돌이라 하는 데 / 里名今道石
  산 이름도 예부터 성산이라 들었네. / 山號舊聞星

  수레에 멍에 매어 좋은 경치 찾길 생각하고 / 命駕思探勝
  흉금을 열고 정원을 거닐었지 / 開襟佇步庭
  봄바람이 불어 서로 약속할 만한데 / 春風可相約
  울긋불긋 꽃 그림자가 숲속 문에 비치네. / 紅綠映林扄

5.
  바위 아래 시냇가 집에 / 石底溪邊宅
  띠풀 엮어 조그마한 정자 일으켰네. / 編茅起小亭
  한가한 몸 아침엔 기둥에 기대고 / 閒身朝倚柱
  그윽한 생각 밤에는 별을 본다. / 幽思夜觀星

  이슬 젖은 작약 붉게 창을 가리고 / 露藥紅迷牖
  서리 맞은 대 푸르게 뜨락을 덮누나. / 霜篁翠覆庭
  때로 마을 술 익었다는 말 듣고 / 時聞社酒熟
  지팡이 잡고 구름 속 문을 나온다. / 扶杖出雲扄


  고봉이 지은 또 다른 시도 음미하여 보자



식영정(息影亭) 운을 차하다 오언 사운 2수




  무등산을 다 돌아보고 / 歷盡山無等
  오는 길에 식영정을 찾았노라 / 來尋息影亭
  자리 사이에는 촛불을 배치했고 / 坐間批玉燭
  소나무 속에 드문 별빛 보이네 / 松裏見疎星

  취한 흥취 모두 술잔 버리고 / 醉興渾抛盞
  거친 회포 뜨락에 눕고 싶어라 / 狂懷欲臥庭
  내일 아침에 무슨 일 있는가 / 明朝有何事
  그윽한 돌길엔 빗장도 필요 없네 / 幽磴不須扃

  맑은 바람 늙은 나무에 불고 / 淸風吹老樹
  밝은 해는 봄 정자에 걸리었네 / 白日麗春亭
  좋은 술 삼해를 기울이고 / 美酒傾三亥
  아름다운 나물 오성을 대하누나. / 嘉蔬對五星
    
  조용히 산과 물 구경하고 / 從容見山水
  교만한 태도로 문정에 있도다 / 偃蹇在門庭
  그대 나와 함께 취미 같으니 / 君與吾同趣
  배회하자 구름은 창가에 가득하구나 / 徘徊雲滿扃

  여기에서 삼해(三亥)는 해(亥)의 일진(日辰)이 세 번 든 것인데, 그 해에는 장마가 진다는 말이 있으므로 그 의미를 취하여 많은 물을 마신다는 뜻인 듯하고, 오성(五星)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다섯별인데 여러 가지 나물 반찬을 먹는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런데 면앙 송순(1493-1582)의 시중에도 고봉의 시 운과 같은 운으로  쓴 시가 있다. 이를  감상하여 보자.

차김상사 성원 식영정운 2수

  남쪽에는 승지가 정말 많구나.
  가는 곳 마다 경치 좋은 정자로다
  내 한가히 지내는 마을은 기촌이고
  그대 사는 산은 바로 별뫼일세.
  친소는 있어도 세분 世分이 같아
  한 가정처럼 왕래한다네.
  말 타고 부담 없이 올 테이니
  사립문 아예 닫지 마시게.

次金上舍成遠息影亭韻 2首

  維南多勝地      隨處有林亭
  我臥村爲企      君居山是星
  親疎同世分      來往一家庭
  匹馬尋常到      松關愼勿扃

  식영정, 환벽당이
  이제는 노형의 정자가 되었구나.
  시내와 산은 비단같이 곱기도 하고
  제택들은 별처럼 늘어서 있네.

  본시 풍월도 함께 하며
  모두가 한 식구로 지낸다네.
  다만 안타까운 건 소쇄원 양산보님이
  시든 풀 속에 구름 닫고 누워 있음이라.

  息影與環碧     今僞魯衛亭
  溪山明似錦     第宅列如星
  自可同風月     元非異戶庭
  只憐瀟灑老     衰草沒雲扃

  송순은 이 시의 앞부분에는 “때는 계해년(1563년) 가을에 주인 김군이 임석천을 위하여 새로 이 정자를 지어주니 석천이 식영이라 이름 붙였다.”고 적고  뒤 부분에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이 일동의 삼승 三勝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때에 소쇄옹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구에 그를 기리는 글을 적는다.” 라고 자그마한 글씨로 적어 놓았다. 이 송순의 설명을 보면 이 시는 1563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우연일까. 송강 정철의 시중에도  고봉과 송순의 운과 같은 식영정 시가 있다.



  식영정 운에 차운하다

  숨어사는 사람(幽人)이 세상을 피하여

  산정에 외로운 정자를 세웠구나.

  아침엔 주역을 보아 진퇴를 정하고

  저녁엔 별을 보아 갠 날과 흐린 날을 아네.

  이끼 무늬는 해 묵은 벽을 오르고

  솔방울은 빈 뜰에 떨어지네.

  이웃에 거문고 가진 객이 있어

  때때로 대사립문을 두들기나니.

  次息影亭韻

  幽人如避世       山頂起孤亭
  進退朝看易       陰晴夜見星
  苔紋上古壁       松子落空庭
  隣有携琴客       時時叩竹扃  

  고봉, 면앙 , 송강 세 사람의  식영정 시는 운이 똑같이 “정 亭, 성 星, 정 庭, 경 扃 ” 이다. 이들이 이 시를 한 날에 같이 만나서 쓴 것인지, 누가 먼저 쓰고 나머지 다른 사람이 그 운에 차운하여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 사람이 운이 같은 시를 쓴 것만으로도  면앙과  고봉, 송강이 모두 식영정을 다니었음을 알 수 있다.

                           (2010.4.15  원고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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