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제8회 풍영정에서- 김언거와 기대승의 인연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2부] 제8회 풍영정에서- 김언거와 기대승의 인연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을 가다. 풍영정은 영산강 상류 극락강과 선창산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중흥파크 맨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정자 들어가는 입구에 풍영정 안내판이 있다.


풍영정  風詠亭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호
          소재지  광산구 신창동


  조선 중기에 김언거(金彦琚  1503-1584)가 세운 정자이다.
‘풍영’이라는 이름은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김언거의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 漆溪이다. 1531년(중종 26)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물러나 이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들과 어울리며 생활하였다.

정자 안에는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쓴 ‘제일호산 第一湖山’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등 많은 문인들의 시가 현판에 남아 있다.  



   이 정자는 1560년(명종 15) 김언거가 승문원 판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극락강 상류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김언거는 1531년에 식년문과 병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장령, 헌납, 금산 군수(錦山郡守), 연안 부사(延安府使)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정자에는 풍영정 현판이 두 개가 있고 제일호산이라는 한석봉의 글씨가 걸려 있다. 둘러보니 수십 개의 편액에 이름 있는 문인들의 풍영정 시가 적혀 있다. 석천 임억령과 하서 김인후가 지은  풍영정 10영, 퇴계 이황과 주세붕의 풍영정시, 면앙 송순과 규암 송인수의 시. 제봉 고경명의 시,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동악 이안눌과 석주 권필의 시, 우산 안방준, 반계 유형원의 차운 시도 있다. 고봉 기대승의 시도 한 곳에 붙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너무나 대단한 문인들의 시가 여러 개 붙어 있어 엄두가 안 난다. 아쉬운 것은 편액이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한시들을  모두 한글로 번역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광산구청에서 번역하여 구청 인터넷에 올리면 좋을 것이다. 그리하면 풍영정의 진가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요즘 문화관광은 더욱 세심하게 고객을 배려하여야 한다.  

  정자 기둥 한쪽에 편액 하나로 붙어 있는 고봉 기대승의 시를 자세히 보았다. 시는 ‘ 次 로 시작하여 遊山羈客不能休... 高峯 奇大升’이라고 적혀 있다. 자세히 읽어 보니 <고봉집>에서 읽은 풍영정 차운 시이다.



       풍영정의 시에 차운하다〔次風詠亭韻〕 김언거(金彦琚)의 정자이다.


산에 노는 나그네 쉬지 못하다가 / 遊山羈客不能休
우연히 선창산에 이르러 시름을 풀었노라 / 偶到仙滄一散愁
바람은 숲 끝에 불어 먼 들판에 보내고 / 風約林梢呈遠野
안개는 물결에 걷혀 긴 모래톱 드러나네. / 烟開波浪露長洲

풍진 속에 삼신산 막혀 한스러울 뿐이니 / 塵埃只恨三山隔
동이 술에 한나절 머문들 어떠하리. / 樽酒何妨半日留
사람의 일 유유해서 마치기 어려우니 / 人事悠悠難自了
응당 와서 늦가을 완상하리라 / 故應來賞待高秋

   이 시를 언제 지었을까. 고봉과 칠계가 만나서 지은 시일까.
김언거는 1560년 이후에는 광주에 살았으니 고봉이 광주에 머문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첫 수의 산에서 노는 나그네와 둘째 수의 우연히 선창에 이르러 라는 시구로 보아  1570년 고마산 아래 낙암에서 지냈을 때를 ‘산에 노는’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고 선창은 극락강변의 선창산에 있는 풍영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고봉이 이곳에 놀러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기대승은 1570년에 광주에 있으면서 대 선배 김언거를 한 번쯤은 만났으리라  생각된다.    

  풍영정에서 극락강을 보니 경치가 빼어나다. 너무 좋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옛 선비들이 술 한 잔 하고 시 한 수 읊었음직하다.

  정자 한 쪽에 비가 하나 있다. 비의 앞면에는  ‘문화재 풍영정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풍영정에 여러 시인 묵객이 드나들었다는 내역이 적혀 있다. 원래 이 정자는  12동이 있었다 하나 11동은 불타고 없고 지금은 1동만 남아있다.

  한편 1584년까지 살았던 김언거는 후배 기대승이 1572년에 별세하자  슬픔에 잠긴다. 24세나 나이 많은 대 선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마음이 착잡하였으리라. <고봉집>을 보니 고봉에 대한 김언거의 만시가  있다.

김언거(金彦琚)  칠계(漆溪) - 만장,  삼십사

어릴 적부터 문장 솜씨 너무나 출중하니 / 出衆文華自妙年
한 시대 드날린 명성 뉘라서 앞설 건가 / 蜚英一代孰能先
대배(정승 벼슬 하는 것)될 재주라고 사람 모두 바랐는데 / 才堪大拜人皆望
오랜 수명 못 누리니 세상 함께 슬퍼하네. / 天嗇脩齡世共憐
문 밖에서 학이 날아 조객을 놀라게 하고 / 門外鶴飛驚吊客
무덤 앞에 새가 모여 찾아온 이 감동시키네. / 墳前鳥集感來賢
나이 많은 이 아직 죽지 않고 고개 숙여 만사 쓰니 / 白頭未死叩題挽
이로부터 공의 모습 구천 멀리 막히리. / 從此音容隔九泉

                             ( 2010.3.18 광산구청 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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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8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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