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7회 고봉 기대승과 송강 정철의 인연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제7회  고봉기대승과 송강 정철의 인연

        

   담양 환벽당을 간다.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한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깃들여 있다. 1551년(명종 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환벽당 주인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가 별당 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내려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그 소년을 만나보니 기상이 좋고 재기가 넘쳐 보였다. 그래서 제자로 삼는다. 그가 바로 정철(1536-1593)이다. 그 때 정철은  순천에 사는  어머니와  둘째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둘째 형은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처가인 순천에서 살고 있었다.  

   송강 정철.  그는 서울 장의동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보면 ‘이 언저리 장의동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써진 표석이 있다. 그는 10살 때 까지는 제법 호사스럽게 살았다. 아버지 정유침은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큰 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셋째 누나가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정철은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도 소꿉동무로서 잘 어울렸다.

   그런데 1545년 7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삼촌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화에 정철의 매형이요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이 연루된다. 윤원형은 윤임을 무함한다. 윤임이 인종 승하 후 왕위를 계림군에게 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었으나 이 소식을 안 계림군이 미리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바람에 혐의가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는 안변 황룡산 기슭에서 삭발하고 스님으로 숨어 있다가 한 달도 못되어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한다.

   계림군의 처가인 정철 집안도 그 불똥이 튄다. 정철의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이조정랑이었던 큰 형은 광양으로 유배를 간다. 일은 엎친데 겹치는 것인가. 2년 후에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큰 형은 다시 붙잡혀 와서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는다.

   이리하여 정철은 1545년 을사사화이후 1551년 아버지의 유배가 풀릴 때 까지 6년간을 공부도 제대로 못 배운 채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정철과 그의 가족은 조부의 묘가 있는 창평 지실마을(지금의 담양군 남면)로 이사를 온다. 여기에서 정철은 26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 까지 11년간을 창평에서 산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김윤제, 송순,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등 당대의 큰 선비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우고 시도 쓰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정철은 17세에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유씨와 결혼을 한다. 김윤제의 사위인 유강항은 처음에는 정철과 자기 외동딸과의 결혼에 탐탁하지 않았다 한다. 객지에서 온 정철에게 무남독녀를 성큼 내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김윤제는 이 결혼을 꼭 성사 시키고 싶었나 보다. 사위가 시큰둥하자 절교 선언을 한 것이다. 유강항은 이런 장인의 행동에 너무 당황하여 결국 결혼 승낙을 하였다 한다.

   무등산 아래에서의 김윤제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는 재산도 많았다 하며 환벽당과 성산 지곡마을 사이의 개울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가 금다리라고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 감사가 나오기도 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송강 정철은 학문을 배우고 국문가사와 한시를 짓는데도 김윤제의 덕을 톡톡히 본다.  송강은  송순에게 국문 가사를 배우고 , 김인후에게  도학과 절의를,  기대승으로부터 성리학을, 임억령에게 한시를 배웠는데  이들은 모두 김윤제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는 김윤제의 처남이었고, 양산보와 김인후는 사돈 간이고, 양산보와 송순과는 이종간이었다. 그리고 김윤제의 제자이자 조카가 김성원인데, 김성원의 장인이 임억령이었다. 또한 김윤제는 나주 목사시절에 기대승이 쓴 <주자문록>을 발간하여 준 고봉의 후원자이었다.

  여기에서 고봉과 송강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여보자. 고봉 기대승이 일찍이 산에 올라가다가 맑고 깨끗한 수석水石 한 개를 보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고봉에게 묻기를 “세상사람 중 이같이 맑은 돌에 비길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고봉이 “오직 정철이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만큼 고봉은 송강을 상당히 똑똑한 인물로 생각한 것이다.

고봉이 지은 시 중에는 정철에 대한 시가 있다.

    계함을 생각하다〔憶季涵〕


꿈속의 매화가 나무에 가득 새로우니 / 夢裏梅花滿樹新
     깨어도 맑은 생각 원빈에 있노라 / 覺來淸想在元賓
     인간에 얽매임 있어 옹졸함 못 감추고 / 人間有累難藏拙
     사물에 대해 경영 없으니 참을 기르기 족하네. / 物外無營足養眞
     늦더위는 한 차례 지나면 감퇴하지만 / 殘暑一回須退減
     사문(유학)은 천고에도 사라지지 않도다 / 斯文千古未埃塵
     어느 때나 서로 만나 좋은 모임 이룰까 / 何時邂逅成佳會
     달대하고 바람 임하니 뜻이 절로 친해지네. / 對月臨風意自親



여기에서 원빈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제자 이관(李觀)의 자이다. 그는 스승과 막상막하라 불렸는데, 고봉 기대승이  자신의 제자인 정철을  한유의 제자인 원빈에 대비한 것이다.

   그런데 고봉 기대승은 선조 5년(1572년) 11월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 때  송강은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짓는다.

기고봉 선생 제문 - 문인 송강 정철

소자가 선생님을 사모한 지가 이미 오래이오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간절해지는 까닭은 선비들의 풍조가 더러운데 물드는 것을 누가 능히 맑게 하며,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가 낮게 떨어지는 것을 누가 능히 높일 수 있겠는 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것을 높이고 맑게 하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신 후로는 세상에 그럴 사람이 없사오니, 외로이 서 있는 사당엔 남기신 자취만이 눈에 선 하옵니다.  

고봉이 별세할 당시에 37살의 송강은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 신원 선산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다시 벼슬길에 오른 때이었다. 이 시기는 아직 동서 당쟁이 본격화 된 시기는 아니었으나, 송강의 제문 내용으로 보아 사림들의 세속화와 패거리가 상당히 심각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강은 1573년 2월 고봉의 장례식 때 아래 만장을 짓는다.


만장(挽章)칠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

산천의 빼어난 기운 타고나시어 / 間氣山川秀
설옥의 해맑은 심성 지니셨어라 / 冲惺雪玉澄
인문이 어두워짐 슬퍼하였고 / 人文悼湮晦
명예 이욕에 치달음 개탄하였네 / 聲利慨奔騰
서책에서 성현 심법 탐구하였고 / 節簡求心法
유가에서 지킬 준칙 얻어 냈어라 / 儒家得準繩
어린 나이 기껏해야 약관 시절에 / 妙齡纔弱冠
높은 안목 벌써 선배 뛰어넘었네 / 高眼已前層
선산 아래 서실을 지어 놓고서 / 築室因山墓
문을 열자 동지 벗이 멀리서 왔네 / 開門自遠朋
가르치심 아무리 줄기차지만 / 誨人雖不倦
선 따르긴 힘겹기가 산을 오르듯 / 從善奈如登
거칠어서 삼반을 알지 못하고 / 鹵莽迷三反
예전대로 일긍을 벗지 못했네 / 因循護一矜
풍진 속에 다행히 두 번을 만나 / 風塵幸再遇
선생의 가르침을 자주 받았으나 / 論議獲頻承
행동거지는 근심스럽게 경망하였고 / 擧措憂常妄
흉금 포부는 안타깝게 넓지 못했네 / 襟期惜未弘
얼굴 대하면 배울 생각 진지해졌고 / 對顔殊綣綣
홀로 있을 때도 전전긍긍 삼갔지만 / 退省尙兢兢
묵은 버릇 여전히 변화시키기 어렵고 / 舊習猶難化
새론 허물만 다시금 날마다 더했네 / 新愆更日增
시대 걱정 그 마음은 서로 같으나 / 悶時心共貫
예의 절차 그 주장은 서로 달랐네 / 會禮說殊稱
노닐던 사찰에 글씨 아직 남았으니 / 到寺書猶壁
문 앞에 가면 경계 말씀 되살아나네 / 臨門戒在膺
송추의 시는 예언을 드러내었고 / 松楸詩獻讖
명막의 말은 조짐을 나타내었네 / 冥漠語垂徵
남교에서 구월 달에 떠날 때까지 / 南郊三秋別
서림에서 육 년간을 수학하였지 / 西林六載燈
후한 은혜 갚을 만한 길이 없으니 / 厚恩無路報
융숭한 대우 내 어찌 감당할쏘냐 / 隆待我何勝
호남 하늘가 나무는 적막도 하고 / 寂寞湖天樹
한강 나루터 얼음은 험키도 한데 / 崎嶇漢渡冰
애통해라 오의는 길을 돌리고 / 吳醫痛路返
서글퍼라 이자는 새벽잠 깨었네 / 李子悵晨興
운정 막히니 눈물은 바닥이 나고 / 淚盡雲亭隔
위령 오르니 넋이 찢어지누나 / 魂傷葦嶺陞
우리들 끝내는 누구를 의지할까 / 吾儕竟何托
아득해라 하늘 뜻 알기 어렵네 / 天意杳難憑


[주D-001]인문(人文) : 예교(禮敎)와 문화를 말한다. 《주역》〈비괘(賁卦) 단사(彖辭)〉에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시킨다.〔觀乎人文 以化成天下〕” 하였다.
[주D-002]삼반(三反) : 정밀하게 공부하고 깊이 사색하여 스승이 깨우침을 주면 그에 대한 의미를 다양하게 파악하여 대답하는 것이다. 《논어》〈술이(述而)〉에 “한쪽 모서리를 들어보였을 때 그 나머지 세 모서리를 헤아려 대답하지 못하면 더 이상 말해 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하였다.
[주D-003]일긍(一矜) : 긍(矜)은 성격이 지나치게 꼿꼿하여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긍은 사람이 지닌 세 가지 병폐 광(狂)ㆍ긍(矜)ㆍ우(愚) 가운데 하나라는 뜻으로, 공자는 “옛날에 긍한 사람은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긍한 사람은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다.〔古之矜也廉 今之矜也忿戾〕” 하였다. 《論語 陽貨》
[주D-004]서림(西林) :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절 이름이다. 주자(朱子)가 이곳에 머물면서 승려인 가사(可師)와 학문을 강론하였다. 《朱子大全 卷2》 여기서는 고봉이 공부한 사찰을 가리킨다.
[주D-005]오의(吳醫)는 길을 돌리고 : 오의는 고봉이 46세 때 사직하고 하향하던 중 태인(泰仁)에 이르러 병세가 심해지자 선조가 보낸 어의(御醫) 오변(吳忭)을 말한다. 고봉은 의원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高峯集 高峯先生年譜, 韓國文集叢刊 40輯》
[주D-006]운정(雲亭) : 낙암(樂菴) 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백운정(白雲亭)을 말한다. 이호민(李好敏)이 지은 만장에 “낙암 위의 처량한 달빛, 아직도 백운정을 비추누나.〔凄凉樂菴月 猶照白雲亭〕” 하였다.
[주D-007]위령(葦嶺) : 노령(蘆嶺)산맥으로, 이 산줄기가 태인(泰人) 아래로 지나간다. 고봉이 태인에 이르러 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넋이 찢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한편 송강은 고봉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고봉 사우에 대하여 특별한 배려를 한 것 같다. 그가 1581년에 전라감사로 있을 당시에 노비와 전토를 주기도 하였다. 그만큼 스승 고봉에 대한 존경심이 많았다.

  선생(고봉을 말함)께서 돌아가신 후 7년 1578년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 아래 낙암동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때에 황강 김계휘공이 본도의 감사로 있어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의 전답 30여석지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 정철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도 지급해 주었다.

                       - 월봉서원 묘정비문 중에서.


   그런데 송강은 고봉이 돌아가신 이후에 4번이나 창평에 낙향한다. 처음 낙향은 1575년,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이 무렵 동서분쟁이 본격화되어 송강은 서인으로서 동인과 대립하였는데 그만 창평으로 낙향을 한다. 그리고 1577년까지 2년간 창평에 머무른다. 이때 그는 <성산별곡>을 지었다 한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두 번째는 그의 나이 44세 때인 1579년 8월부터 1580년 1월까지 5개월간이다. 이후 그는 강원도관찰사 벼슬을 제수 받는데 <관동별곡>의 첫 머리에는 이 당시의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 백리에 방면을 맡기시어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세 번째 낙향은 그의 나이 46세 때. 1581년 6월부터 그해 12월까지 6개월간이다. 이후 그는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마지막 낙향은 1585년 ,  그의 나이 50세 때이다. 그는 대사헌으로 일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말을 타고 출입을 하여 총마어사로 불리는 등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 후 서인의 중심인물이 된 그는 동인의 논핵을 받아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에 머물렀으나 끝내 1585년 8월에 창평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그는 주로 송강정에 머무르면서 정치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불후의 명작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짓는다. 이 사미인 思美人 국문 가사들은 선조 임금을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인데 굴원의 이소에 견주어 동방의 이소라 평하고 있다.  1589년 10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고  기축옥사의 조사책임자가 된다.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 담양 식영정에는  성산별곡비가 세워져 있고, 비 뒷면에 담양과 정철에 대한 내력이 적혀 있다. 비 옆에 서 있는 낙락장송 소나무도 일품이다. 가사문학관에는 송강가사가 전시되어 있고,  송강정에는  사미인곡비가 있다.

이 몸 삼기실제 임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노여 업다.

   송강 정철. 그는 국문시가의 개척자이다. 우리나라 말의 조형성을 가장 아름답고 감칠맛 나게 표현한 시인이다. 남도 땅 창평은  송강 가사 문학을 탄생시킨 본향이다. 그리고 그의 스승이 바로 고봉 기대승이다.    


                                  ( 2010.3.2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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