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6회 고봉 기대승과 청련 이후백의 문장 겨루기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제6회 고봉 기대승과 청련 이후백의  문장 겨루기

   사람들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 正史의 기록보다도 대동야승과 같은 야사 野史에 나오는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유몽인이 쓴 책 <어우야담>과 작자 미상의 책 <기문총화>에는 기대승과 이후백의 문장 겨루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오겸(1496-1582)이 광주목사 시절에 고봉 기대승(1527-1572)과 청련 이후백(1520-1578)을 초대하였다. 오겸은 미리 아전들에게 단단히 분부를 하여 기생들이 화려하게 몸단장을 하고 성대한 잔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마침 엇비슷한 시각에 도착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 오겸이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 오늘 두 분을 청한 것은  한 바탕 이야기하면서 회포를 풀고 주량을 겨루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서울에 있을 때 평소부터 두 분이 종장의 유림이라는 것을 널리 알고 있었나이다.  그래서 오늘 두 분의 글재주를 겨루는 시합을 하여, 백년에 한번이나 볼 수 있는 문장 솜씨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오니 두 분께서는 사양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대승은 그 자리에서 나이 어린 기생에게 먹을 갈라 하고는 종이를 펼쳐 7언 율시 8편을 그대로 써 내려갔다. 글자에 점 하나도 고칠 것이 없이 붓을 휘둘렀는데 마치 나비가 나는 듯  하였다.

이후백 또한 화전 華牋(종이)을 눈썹만큼이나 쌓아놓고 마음대로 붓을 휘둘러, 교방에 소속된 80여명의 기생들에게 자신이 지은 장편, 단편, 율시, 고시 古詩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골라 가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즐긴 다음에야 잔치가 끝났다.
  그 다음날 오겸은  전 날  화려하고 성대하게 차렸던 주안상들을  모두 치우고 별도로 떨어진 서재로 가서 간소하게 술상을 차렸다.

술기운이 약간 오르자 오겸이 다시 청하였다.

“어제는 두 분의 시 겨루기를 잘 보았소이다. 오늘은 천고의 일을 상세히 논하고 평생토록 기억한 것을 각기 말씀하여 주시지요.”  

이후백은 <자치통감강목>중에 표 表를 다스리는데 가장 능한지라 겉으로 두드러진 것 이외에 그 밖의 150책 가운데 미세한 장구에 이르기까지 척척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기대승 또한 <자치통감강목> 가운데 이후백이 논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본기와 본전에서 출처를 들어 제시하였다. 여러 학자들의 크고 작은 설명을 훤히 꿰뚫어 해당되는 대목을 만나면  
외워내곤 하였는데, 더러는 전편을 더러는 수십 행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글의 뜻을 요약하여 말하는 데 꿰뚫고 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오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하면 말하였다.

“어제의 겨루기에서는 이공 李公이 능히 기공 奇公을 이겼고, 오늘의 겨루기에서는 기공이 능히 이공을 이겼소이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친 모임은 참으로 우리 사림에 전무후무한 멋진 일이었소이다.  동정호에서 듣는 균천광악(천상의 음악)이나 월궁에서 듣는 예상우의곡(당 현종이 들었다는 달나라 월궁의 음악)도 이곳 광주의 잔치 보다는 성대하지 못할 것이외다.”


  이후백 李後白은 시 詩의 대가이다. 이름도 당나라 시선 이백(701-762)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후백이요, 호도  이백의 호 청련 淸蓮을 그대로  썼다. 기대승은 문장의 대가이다. 일찍이 주자의 성리학을 독파하여 <주자문록>을 썼고  종계변무주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부탁으로 이황의 부친 묘비명도 지었으니 문장력은 가히 최고이다.

   오겸은 한때 담양부사도 하였고 송순이 면앙정을 다시 지을 때 지원을 하여준 바 있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다.

이 세 사람이 벌인 글 잔치가 야사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멋진 이야기 거리이다.

한편 고봉 기대승과 청련 이후백은 평소에 친교가 잦았다.

<고봉집>에 보면 고봉이 청련에 보낸 시가 여러 수 있다.
그 중에 고봉집 외집에 나오는 시를 읽어보자.  
                      

  
    계진의 시에 차운하다〔次季眞韻〕

숲 속의 방초 길은 높고 낮은데 / 長林芳草路高低
구름 속의 층층 성은 희미하게 보이네. / 雲裡層城望欲迷
노 하나로 불그레한 정자에서 푸른 물결을 타니 / 一棹紅亭乘碧浪
조각 돛은 저 멀리 무지개 서쪽을 가리키네. / 片帆遙指綵虹西


  이후백은 고봉이 1572년에 별세시 만장을 지었는데 그 시가 <고봉집>에 실려 있다.




이욕이 인심 미혹해 일마다 잘못되더니 / 利欲迷人事事非
남쪽에서 그대 나서 전휘(전인 前人의 아름다움이란 말로, 성현의 심법(心法)과 송대의 도학을 말한다)를 이었어라 / 君生南服紹前徽
쇠한 풍속 바로잡아 순박한 옛날로 돌릴 뜻이었고 / 志扶衰俗還淳古
성현의 글 융회하여 깊은 뜻 밝힐 정신이었네 / 神會遺編闡奧微
잠시나마 고향 이별 함께 애석해했는데 / 共惜鄕園聊蹔去
신세 길이 멀어짐을 뜻밖에 들었구려. / 忽聞身世已長違
현인 죽음 예로부터 시운과 관련 있으니 / 云亡自古關時運
어찌 차마 금년에 눈물 두 번 흘리게 되네. / 可忍今年淚再揮
( 눈물 두 번 흘린다는 것은 1572년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이미 세상을 떠난 데 이어 고봉이 또 세상을 떠났기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


                           (20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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