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5회 고봉 기대승과 송천 양응정의 만남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 기대승(1527-1572)이 낙향하여 살던 광주광역시 광산구 두정동 두동마을에서 나주 쪽으로 8-9km를 가면 임류정이 있다. 광산구 박호동 박산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이다. ‘물에 임하여 있는 정자’라는 의미의 임류정 臨流亭은 선조 임금 때 팔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송천 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2)이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 기둥 위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있다. 그 중 한 편액에는 양응정과 교류한 기대승, 김인후, 백광훈의 시가  함께 걸려 있다.

여기에서 고봉 기대승의  한시를 읽어 보자.


   백씨의 시에 차운하여 공섭(공섭은 양응정의 자 字임)에게 보내다
   次伯氏韻 呈公燮


홀로 긴 두레박줄 가지고 샘물을 길으며  
    사람 없다고 곧 거문고 줄 끊지 않네.  
    시험 삼아 양장의 백팔 굽이 밟아보고  
    마침 붕새의 날개 따라  삼천 리 물을 박차리.
    
    들녘 정자에서 시구 얻으니 총채에 바람 일고  
    강가의 누각에서 술잔 돌리니 달은 자리에 가득하네.
    거칠어 공부 못함 스스로 부끄러워      
    우연히 이웃 만나 망년교를 맺었네.  


  獨將脩綆汲寒泉
     不爲無人便絶絃
     試躡羊腸盤百八
     會隨鵬翼擊三千
    
     野亭得句風生麈
     江閣傳盃月滿筵
     自愧狂疎功力缺
     偶因隣曲忝忘年

    
     고봉이 쓴 이 시는 고봉이 송천과 늘그막에 교우한 것을 그리는 시이다.  첫 수는 송천의 인품을 이야기 하면서 고봉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고, 두 번째 수는  임류정에서 같이 술 마시며 회포를 푸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첫째 수의 한문 용어를 해설하여 보자. 절현 絶絃은 춘추 시대에 가야금을 잘 탔던 백아 伯牙가 음의 가락을 가장 잘 알던 벗 종자기 鍾子期가 죽자 그 가야금 소리를 들을 사람이 이제 없다 하여 가야금 줄을  모두 끊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흔히 지음이라 하면 가장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를 칭하기도 하는 데 고봉과 송천의 관계를 지음 知音으로 표현한 것 같다.  

   ‘양장(羊腸)의 백팔 굽이’는 매우 험준한 고개를 의미하는데, 세상길이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의하면 ‘양장령(羊腸嶺)은 소주부(蘇州府) 천평산(天平山) 남쪽에 있는데 염소 창자같이 구불구불하므로 이름이 되었다’ 한다.

   ‘마침 붕새의 날개 따라  삼천 리 물을 박차리’는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원대한 뜻을 품었다는 말이다. 《장자》〈소요유(逍遙遊)〉에 보면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물을 3천 리나 박차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날아오른 뒤에야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고 적혀 있다. 이는 송천이  큰 포부를 품었음을 비유하고 있다.  이 첫 수를 음미해 보면 고봉이 송천을 큰 인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천 양응정. 그는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던 해 화순군 도곡면에서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팽손은 바로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의로운 선비이다. 양응정이 다섯 살 되던 해, 양팽손은 세상이 싫어 화순 쌍봉사 근처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를 한다. 한 칸 집을 다 짓자 학포는 벽에다 큰 붓으로 ‘문왕의 아들로서 무왕이 태어났도다. 학포 양팽손의 자식 양응정’이라고 적었다.  

    양응정은 아버지 양팽손에게 공부를 배웠다. 그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과 정자에 임명된다. 1555년(명종10년)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70척의 배를 이끌고 달량포(영암의 한 포구)를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장흥군수가 전사하고 영암군수가 포로가 되는 등 국방에 구멍이 크게 뚫리었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호조판서 이준경을 급파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후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비변사를 설치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556년 2월 명종 임금은 모든 관리들에게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적어 내라고 하였다. 양응정은 이 시험에 장원을 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는 승진하여 이조좌랑에 오른다. 그런데  그는 기개가 너무 강하여 굽힐 줄 몰랐다. 명종 비 심왕후의 외삼촌 이량에게 밉게 보여  관서, 관북평사로 발령이 난다. 이때부터 그는 외직으로 내몰리는 고난이 시작된다. 양응정은 자신을 “나는 글 쓰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다만 센 활로 오랑캐를 쏘아 마칠 줄을 알 뿐이다.”라고 자탄을 한다.

  나중에 택당 이식(1584-1647)이 오평사영 五評使詠 시에서 ‘유명한 양공 부자는 산골짜기를 울리고 다니는 호랑이였네. 오색의 붓을 던져 버리고 활을 당겨 서쪽 오랑캐를 쏘려 했네.” 라고 양응정을 평한 것도 그가 외직에 머문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었다.


  1558년에 양응정은 다시 내직으로 들어간다. 이 때 그는 정사룡과 함께  별시의 고시관이 된다. 양응정은 <천도책 天道策>을 시험문제로 낸다. 이 문제는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기상의 이변에 대한 이치를 찾는, 이름 그대로  하늘의 도에 관한 것이었다.


<천도책> 시험문제는 이렇다.


   하늘의 도(天道)란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떠다니며  한번 낮이 되고 한번 밤이 되기도 하는데,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한 것은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간혹 해와 달이 한꺼번에 나와서 때로는 겹쳐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략)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각각 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기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 가지의 변화가 되는 것인가. 만일 올바른 길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기가 어그러져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이 잘못된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아니하며, 눈과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아니하고 모진 바람과 궂은비가 없이 각각 그 진리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것인가.    


   이 시험문제에 대하여 별시에 응시한 율곡 이이(1536-1584)가 유창하게 답안을 쓴다. 그가 쓴 답안의 요지는 이기합일 理氣合一과 천인상감 天人相感이다. 즉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기가 바르면 천지의 기도 역시 바르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야 천지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지가 안정되려면 덕 있는 군주가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고 끝맺는다.


    <천도책>은 명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중국의 사신이 이를 보고 “천하문장의 책제이요, 일대현사의 답안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천하문장이 낸 시험문제이고 일대의 현명한 선비가 쓴 답안이라는 것이다. 절개의 선비, 사암 박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공섭(양응정의 자)의  책제는 일세의 문장이며, 숙헌(이이의 자)의 답안은 실로 궁리의 학문이다. 만약 처지가 뒤바뀌어 공섭이 응시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답은 이와 똑같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1571년에 양응정은 또 한 번 시련을 겪는다. 진주목사를 거쳐 경주부윤으로 승진하였으나  파직이 된 것이다. 양응정은 낙향하여 고향인 능주에서 처가인 나주 박산(지금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임류정 臨流亭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이 당시에 기대승은 양응정과 자주 어울렸다. 기대승과 양응정은 서로 동병상련 한 것이다. 송천 집안과 고봉 집안은 예전부터 아는 처지이다. 둘 다 1519년 기묘사화로 희생된  집안이다. 고봉의 삼촌 기준이 기묘사화로 유배를 간 후에 교형 絞刑에 처해졌고, 송천의 아버지 양팽손은 파직되어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 더구나  1571년 그 때를 살펴보면, 기대승은 조정에서 원로대신들과 불화하고 소외당하여 고향으로 낙향한 처지이고 양응정도 파직당하여 박산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 시절에 잘 어울린 것은 고봉이 지은 임류정 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임류정에서 공섭이 화운하기에 다시 차운하다

〔臨流亭公燮和韻 復次之〕

    소나무 끝에 맑은 달 유유히 떠오르니
술을 잡고 물에 임해 모든 걱정 흩트리노라
인간 세상에 몇 번이나 영화와 근심을 보았던가.
술 취한 중에도 이 인생 덧없음을 알겠네.

     松梢淸月上悠悠
把酒臨流散百憂
人世幾看榮又悴
醉中渾覺此生浮


이 시는 고봉집에 실려 있다. 이 시를 읽으면 고봉과 송천이 같이 술을 마시고 임류정에서 노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송천이 고봉에게 화답한 시는 남아 있지 않다.

한편 고봉은 1572년 11월에 별세한다.  송천은 고봉에게 제문을 지어 올리며 조문을 한다.  여기에서 양응정이 지은 제문을 읽어보자


세차 계유년(1573년) 2월 2일 계축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前) 행 진주 목사(行晉州牧使) 양응정은 삼가 맑은 술과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여 부제학 고봉 기 선생의 영전에 삼가 제사 드립니다.

공께서 / 惟公
재주 넓혀 분발하시매 / 弘己而奮
큰 포부 다하실까 했는데 / 謂極良圖
이처럼 영영 가시어 / 遽此長辭
시대 요구 저버렸네. / 奈孤時需
하늘이여 신이시여 / 天乎神乎
사통팔달 다 통하고 / 繄如其逵
선현 사업 이었으니 / 克幹厥蠱
남긴 터전 없겠는가. / 貽豈無基
배우는 자 소득 많고 / 求之多獲
서업 또한 이어져서 / 緖亦不墜
영원토록 미치리니 / 永世者存
나머지야 모를레라. / 餘付宵寐
생각하면 못난 내가 / 尋思蹇鈍
얼마나 배웠던가. / 幾承策勵
애통하며 전 올리니 / 痛深來奠
산고수장 영원하리 / 山高水逝
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

  제문의 요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산고수장하시요,기대승이여’ 이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다’는 뜻으로, 고봉이 남긴 자국이 장차 그러하리라는 의미이다. 송나라 범중엄(范仲奄)의 〈엄 선생 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서 “선생의 유풍이여,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게 가리.〔先生之風 山高水長〕”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고봉 기대승과 송천 양응정. 두  사람은  피다가 활짝 피지 못하고 그냥 지고 만 한 떨기 꽃이다. 경륜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호남의 유학자이다.



                (20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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