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2회 면앙정에서...송순과 기대승의 인연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제2회 면앙정에서(1) - 송순과 기대승의 인연

                
1.

  면앙정을 간다.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면앙정은  면앙 송순이 지은 정자이다.  송순(宋純 1493~1582). 그는 국문가사 <면앙정가>를 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면앙정 가단 俛仰亭 歌壇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신평, 자는 수초 또는 성지, 호는 기촌 또는 면앙(면앙정)인 그는 담양군 기곡면(지금의 봉산면) 기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9세때 곡조문 哭鳥文이라는 시를 지어 주위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 신동이었다.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유년기에 그는 숙부 송흠에게 글을 배웠으며 21세에 진사가 되어서는 당시 담양부사인 박상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26세 때는 송세림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나이 26세(1519년 10월)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광조, 김구등은 그를 보고 탁영 김일손 이후 이런 뛰어난 문장가는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등 개혁 사림파들은 심정 · 남곤등 훈구파들에 의해 화를 입는다. 이에 송순은 크게 낙담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다음 시를 지었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볕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이 시는 사림파의 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생기가 가라앉은 현실을 아파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런데 훈구파들은 이 시에 중상 中傷의 뜻이 있다는 시비를 하여 송순은 자칫하면 화를 당할 뻔 하였다.

한편 평소에 김안로의 전횡을 간언한 송순은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41세(1533년)에 고향인 담양으로 낙향한다. 그리고 면앙정을 짓고서 시나 읊으면서 자연을 벗 삼아 4년간을 지낸다. 어쩌면 송순은 타고난 벼슬 운이 있었나 보다. 1537년에 김안로가 사약을 받은 지 5일 만에 그는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 집의에 오른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충청도 어사 등을 지냈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한다.

  545년. 명종 원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대윤 윤임 일파는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한다. 이 때 그는 유명한 상춘가 傷春歌를 짓는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오.


  이 시는 을사사화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림들을 봄 날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 비유하여 세상을 개탄하는 노래이다. 마치 암울했던 70년대 80년대를 우의하여 사람들에게 불러지다가 금지된 대중가요처럼. 여기에서 꽃은 사화로 희생된 현인 사림들이고, 바람은 간신배들을 말하며, 희짓는(심술부리는) 봄’은 어수선한 세태를 말한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를 풍자한 시를 여러 편 쓴 송순은 1550년에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그해 6월에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 수원 등으로 귀양을 간다. 그리고 1년 반 후에 귀양에서 풀려나 1552년 3월에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건하였다.

  이 후 70세에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은퇴하여 면앙정에서 머문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교우로는 신광한, 성수침, 나세찬, 이황, 박우, 정만종, 송세형, 김윤제, 임억령 등이 있고,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 임형수, 노진,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이 있다.

  2.

  면앙정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다. 상수리 나무와 대나무가 있는 계단을 두 번이나 지나야 정자에 이른다.  정자 앞에는 면앙정가비가 있고  왼쪽에 면앙정 안내판과 중수비 그리고 고봉 기대승이 지은 <면앙정기>비가 있다.

   면앙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방이 있고 사방에 빙 둘러서 마루가 깔려 있다. 이 정자 뒤는 벼랑이고 전망의 중심은 정자 뒤편에 있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깔린 평야, 그 위로 탁 트인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면앙정은 송순이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이다. 그가 면앙정을 지은 것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래 면앙정 터에는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금어 金魚와 옥대 玉帶를 두른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오락가락 하는 꿈을 꾼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을 할 것이라 여겨 아들을 공부 시켰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집안마저 가난해졌다. 곽씨는 이곳의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다. 뒷날 이곳이 소위 면앙정 가단을 이루어 당시에 이름난 학자, 가객, 시인들의 창작의 산실 휴식처가 된 것을 보면 곽씨가 해몽을 틀리게 했지만 꿈은 제대로 꾸었던 것 같다.

    송순은 1524년에 곽씨로부터 이 갈마음수 명당자리를 매입한다. 그리고 1533년에 면앙정을 짓는다. 곽씨의 꿈대로 면앙정을 드나드는 출입객들은 호남제일의 가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김인후, 임억령, 소세양, 양산보, 기대승, 박순, 고경명,정철, 임제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고,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이 정자를 지은 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아래 시는 너무나 유명하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면앙정자 앞에는  <면앙정 俛仰亭> 현판이 있다. 한문 글씨가 또박또박하게 잘 써져 있다. 이 글씨는 당대의 명필 청송 성수침(1493- 1564)이 썼다 한다. 송순은 면앙정 현판 글씨를 받기 위하여 성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갔다 한다. 그런데 성수침의 아들이 바로 우계 성혼이다.


   3.

   이윽고 나는 정자 마루에 오른다.  <면앙정> 현판이 붙은 왼편 마루 위에는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퇴계 이황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가 함께 적힌 현판, 석천 임억령과 제봉 고경명의 <면앙정 30영시>편액, 그리고 동악 이안눌의 <차벽상운> 현판 등이 붙어 있다.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편액을 보자.

俛有地 仰有天
亭其中 興浩然
招風月 揖山川
扶藜杖 送百年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이 얼마나 담백하면서도 자연과 함께 노는 무위도가인가. ‘면유지 앙유천이라’.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이 첫 구절에 송순의 마음이,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을 면앙정이라 한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원래 면앙 俛仰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것(앙불괴어천 仰不怪於天, 부부작어인 俯不作於人)이 큰 즐거움이라고 한 <맹자> 진심장 盡心章에서 말한 부앙을 조금 바꾼 것이다. 부나 면은 모두 굽어본다는 의미이니 송순이 부를 면으로 바꾼 것 같다. (맹자 孟子의 <진심장 盡心章>에는 군자삼락 君子三樂이 실려 있다.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 一樂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仰不愧於天이며 俯不作於人이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三樂)이다.)

   송순이 살았던 시기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로서 지조있는 선비들은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면앙이란 뜻은 송순 자신의 수신 修身이요 삶의 길이었다. 이런 인생관이 위 시 <면앙정 3언가 俛仰亭三言歌>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하겠다.


    면앙정  마루에는  제봉 고경명과 석천 임억령의  <면앙정 30영>시가 있다. <면앙정 30영>시는 면앙정에 관한 30가지 정경을 시로 읊은 것이다. 그것은 추월취벽(秋月翠壁: 추월산의 푸른절벽), 용구만운(龍龜晩雲: 용구산의 늦은 구름) 몽선창송(夢仙蒼松: 몽선의 푸른 소나무), 서석청람(瑞石晴嵐 :서석산의 아지랑이), 금성고적(金城古跡: 금성산성의 옛 자취), 목산어적(木山漁笛: 목산어부의 피리소리), 사두면로(沙頭眠鷺: 모래톱에 조는 해로라기),송림세경(松林細逕: 송림으로 뻗은 오솔길)등등이다.

  4.
  
   한편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현판 옆에는 퇴계 이황(1501-1570)의 면앙정 관련 시와 하서 김인후(1510-1560)의 <면앙정운>시가 함께 적힌 편액이 있다. 이황와 송순은 송순이 선산도호부사로 있을 때 친교가 잦았다 한다. 퇴계 이황은 <차면앙정운>을 남겼고 송순 부친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여기에 붙어 있는 그의 시는 <차면앙정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서와 퇴계는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한 사람으로 영 호남 두 선비는 두터운 교우 관계를 가졌다. 또한 퇴계 이황의 호남과의 인연은 고봉 기대승과 7년간 사단칠정에 대하여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서 절정에 이른다. 이 理와 기 氣에 대한 논쟁인 ‘사단칠정논변’은 명종 시절 권신의 전횡에 숨 막혀 있던 사림들에게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퇴계와 하서의 한시는 편액 글씨가 너무 희미하여 읽기가 힘들다. 먼저  <면앙정집>에서 찾은 퇴계의 시를 살펴보자.

일곱 구비가 높고 낮으며 두 냇물을 끌어당기니
푸른 비단 빛 같이 앞에 둘렀네.
처마에 매인 해와 달은 머뭇거리며 지내고
좌우로 둘러있는 영과 호 壺는 아득하게 보이네.
늙은이의 꿈이 희미하니 옛일이 허무하고
그대의 도움이 쌓였으니 경치가 값지네.
사람마다 이 가운데 즐거움을 알려할 진데
청량한 바람과 상쾌한 달빛이 같이 전할 것이네
소나무 대나무 소소하고 산길은 깊은데
정자에 올라보니 산봉우리가 난간에 비꼈네.
그림 같은 그림이 은근히 비치며 냇가와 언덕은 광활하고
마름과 냉이는 군데군데 수목은 울창하네.
꿈속에도 깊은 관심은 꾸지람을 당하던 날이요
읊으며 생각나는 것은 무마되던 때이네.
어느 때 굽히고 우러러 보며 내 뜻을 따라서
그전에 사무쳤던 수심을 떨쳐버리는가.


   하서의 시는 <하서 김인후 시선>책에서 찾았다. 이 책에는 ‘면앙정 운’ 2수중 두 번째 시만 소개되어 있다.


두건에다 막대 짚고 주인 손님이 모였는데
숲을 둘린 작은 정자가 높고도 밝구나.
새벽 절 종소리는 바람 따라 들려오고
구름 깔린 넓은 하늘에 기러기는 먼 길 가네.
황혼에 달 떠오르면 산이 더욱 고요하고
동 트면 대나무 흔들려 이슬이 먼저 마르네.
한가한 가운데서 참맛을 얻었으니
만사가 유유하다 나와 무슨 관계인가.


  그 옆에는  동악 이안눌이 1610년에 담양부사 시절에 면앙정에 와서 쓴 글인 <차벽상운>편액도 있다. 면앙정 오언시이다.

옛날에 무등곡 들으려고
누가 이 정자에 왔다 하였는고.
학의 날개는 구름 밖에 번득이고
용의 허리는 물굽이에 오그렸네.

늦은 노을은 붉은 비단이 흩어졌고
개인 산 봉우리는 푸른 병풍이 열렸네.
알건데 참으로 신선의 집이니
읊으며 감회를 누를 길 없네.

                                                ( 2009.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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