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제1회 퇴계와 고봉 죽어서도 함께 지내다. - 나주 경현서원에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고봉 기대승 기행 2부>

제1회 퇴계와 고봉, 죽어서도 함께 지내다.
        - 나주 경현서원에서


  나주에 있는 경현서원을 간다. 경현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큰 선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기대승, 김성일등 일곱 분을 모신 서원이다. 이중에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은 문묘에 배향된 동방5현이다.

   경현서원을 인터넷에서 찾았다. 주소는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이다.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나주시청 관계자에게 문의하였더니 자세히 알려 준다.

   나주시에 있는 동신대학교 정문에서 오른편으로 831번 국도를 따라 노안면 쪽으로 가면 예비군 훈련장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면 석재 공장이 여러 개 나온단다. 여기에서 하차하여 자세히 보면 ‘경현서원 입구’라는 표시돌이 하나 있단다. 이 석재공장을 감싸고돌아  3-4백 미터를 가면 왼편에 건물이 하나 있고 오른 편에 집이 두어 채 있는데 왼편 기와집이 바로 경현서원이란다.

  차를 타고 가면서 경현서원이 세워진 내역을 살펴본다. 1583년 (선조 16년) 8월에 학봉 김성일(1538-1593)은 나주목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4년 봄에 대곡서원을 세운다. 당시의 서원은 나주의 서문 밖에서 5리 떨어진 대곡동(현재의 경현동 부근)근처 이었다. 이 때 김성일은 율시(律詩) 한 수를 지었다.

누가 알앗으리오. 선비들이 공부하는 서당이,
심상하게 나주 성곽 시가지 근처에 있을 줄을.

誰知俊造藏修地 只在尋常城市間
      
   그런데 김성일은 1586년 12월에 나주목사에서 해임된다.  사직단(社稷壇)의 재실(齋室)이 불이 나서 전부 타 버리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김성일에 이어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임윤신(任允臣)목사 때 대곡서원은   지방 유생 나덕준 등의 발의로 1589년(선조 22)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모시는 오현사(五賢祠)로 명칭이 바뀐다. 특히 이 시기에는 김천일,  정개청,  안방준 등 호남에서 이름난 선비들이 서원의 원장을 맡아서 서원이 번창하였다.

   정유재란 때 오현사는 소실된다. 그리고 1608년(광해군 원년)에 중건되며, 1609년에는 경현이란 액호를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경현이란 사액을 받은 것은  한훤당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굉필을 모신 순천 옥천서원의 강당 이름도 경현당이다.  

  이어서 1693년(숙종19)에는 기대승 (1527-1572),김성일(1538-1593)을 추배하여 모두 일곱 분을 모시게 되었다. 이후 1868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경현서원도 1871년에 훼철되기에 이른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1977년에 이곳  영안마을로 이전하여  복원된 것이다.

   나주시청 직원이 알려 준 대로 길을 가니 광산석재 공장 바로 옆에 경현서원 표시석이 있다. 광주 첨단에서 이곳 까지는 대략 40-50분  정도 걸린다.  서원 입구에 도착하여 보니 서원에 대한 안내판이 없다. 그래서 이곳이 경현서원이 맞는지 의아심이 들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 서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강당에 걸린 현판을 보고서 경현서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서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동재와 서재도 없고, 앞마당에 묘정비와 강당 신축 관련 비 두개만 덜렁 있다.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를  배향한 서원이 이렇게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니.

  사전에 만나기로 한 김굉필의 후손 되시는 분 두분을 만났다. 그 분들의 안내를 받아 강당 뒤편으로 갔다. 사당 이름은 경현사이다.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일곱 분의 위패가 나란히 있다. 맨 왼쪽에 김굉필의 위패가  있고, 그 다음이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기대승 , 김성일 순으로 모시어져 있다. 우연하게도 퇴계와 고봉 선생은 바로 옆에 위패가 있다. 죽어서도 같이 지내는 모습을 보니 참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선현들에게  재배를 올리었다. 그러면서 고봉 기대승과  같이 모셔진 분들에 대한 인연을 생각하여 본다. 먼저 고봉과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의 관계이다. 김굉필은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로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 것을 계기로 평생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순천에서 유배 중에  극형에 처해졌다.  순천 옥천서원, 현풍 도동서원에 그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고봉은  1567년 10월23일 경연에서 선조에게 성리학의 정통이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짐을 이야기 하였고,  순천의   경현당기와 옥천서원기를 쓴다. 그리고 김굉필에 대한 행장도 짓는다.  

   다음은 고봉과 조광조에 관한 인연이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사림파의 영수로 중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훈구파인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무함으로 1519년 기묘사화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조광조는 고봉의 삼촌 기준의 친구이기도 한데 고봉은 선조에게 조광조의 복권을 건의한다. 또한 고봉은 화순 죽수서원에 대한 축문과 조광조에 대한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고봉과  이언적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자는 복고(復古)이고, 자호(自號)는 회재(晦齋)이다. 처음 이름은 적(迪)이었는데, 중종 임금께서 언(彦)자를 넣도록 명하여 언적이 되었다.  그는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1547년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은  명종 시절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인데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불린다. 그의 저서에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고봉은 억울하게 희생된 이언적을 선조에게  복권하도록 건의하였고 그에 대한 신도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고봉과 퇴계의 인연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고봉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리움이 사무쳐서 여러 시와 글을 남겼다. 퇴계의 묘소에 있는 비문도 고봉이 지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고봉과 학봉  김성일 (1538-1593)과의 관계이다. 학봉은  퇴계의 문인으로서 고봉보다 나이가 11살이나  아래이다.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의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역할을 하였으며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김성일은 선조에게 일본에 대한 잘못된 정세 보고를 한 인물로 기억된다.  1590년에 선조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1591년에 귀국한 사신들은 선조에게 엇갈린 정세보고를 한다. 서인의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담력이 있고 눈이 빛나 보인다’며 침략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 데 반하여 동인인 김성일은 ‘풍신수길을 쥐새끼 같다고 폄하하면서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보고한 것이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죄인 취급을 당한다. 이를 사죄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하는  초유사로 근무하면서 전장을 누비고 곽재우, 김시민등 의병장들을 독려하여 왜군과 힘겨운 싸움을 한다.  그러다가 1593년 봄에  진주성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

   한편 고봉 기대승이 별세할 때 예문관 검열이었던 학봉은 고봉에 대한 만시를 쓴다. 퇴계 선생이 별세한 후로 고봉에 의지하여 학문을 배우려 했는데 갑자기 고봉이 별세하여 슬프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고봉과  정여창과의 인연을 찾을 수가 없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서 호는 일두(一蠹)인데 갑자사화로 희생되었다.

   다시 생각하여 보니 나주의 경현서원은 여러 가지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 하나는  동방의 오현을 비롯한 조선 유학의 현인들을 모신 곳이고, 그 둘은 영남과 호남의 명현들이 함께 있다는 점이고, 그 셋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죽어서도 같이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경현서원은 영남과 호남의 유림이 함께 만나고, 영남과 호남이 화합하는 장소이다. 영남 유림들이 나주 목사골에서 매년 배향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3월7일이 제향일이라고 한다).영남의 유림 김성일이 나주 목사로 와서 서원을 짓고, 김굉필, 조광조, 이황등 동방 오현이 이곳에 함께 배향 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 더욱이나 퇴계와 고봉은 죽어서도 함께 지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향기로운 인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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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제1회_사진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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