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회 연재를 마치면서 - 다시 월봉서원에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다시 월봉서원에서

   광산구 산월동 월봉서원 터를 답사한 며칠 뒤에 월봉서원을 다시 찾았다. 신도비 옆에 있다는 주춧돌 10개를 찾아보기 위하여서이다. 주춧돌은 금방 찾기 어려웠다. 한참 두리번거린 후에야 신도비 근처의 공터에 있는 주춧돌을 찾았다. 주춧돌과 관련된 안내판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여 안내판만 찾았던 것이다. 10개의 주춧돌은 한 곳에 묻혀있다. 이 초석들 위에 월봉서원이 지어졌으니 주춧돌은 문화적 기념물 가치가 충분하리라.

   주춧돌 근처에는 한문으로 된 신도비와 한글로 번역된 신도비 병서 비가 있다. 2003년에 세워진 신도비의 비문은 경제학자이고 학술원 회원이며 경제부총리와 전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조순 교수가 지었다. 조순 교수는 현재 월봉서원 원장이기도 하다.

   신도비는 원래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남동쪽 길가에 세우는 비석인데,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면 고봉 선생의 신도비는 묘소로 가는 길에 세워지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고봉 선생 신도비는 여느 인물들의 신도비처럼 선생의 가계와 생애, 업적 그리고 후손과 그에 대한 찬사로 되어 있다. 그의 큰 업적은 무엇보다도 사단칠정논변과 논사록일 것이다.

   그런데 한글 번역비 신도비 병서도 읽기가 쉽지 않다. 한문이 너무 많이 쓰여 있다. 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비문을 읽었다. 마지막 부분의 찬사는 감동적이다.


창졸의 순간이라도 몸가짐과 행실을 엄중하게 지키었으니 사림의 아망 雅望은 별 중에 북두성과 같았다. 맹자의 말씀대로 천명을 순 順하게 받으셨으며 백세에 향기를 남기셨도다.


다시 월봉서원으로 들어간다. 월봉서원 강당마루에서 조순 교수가 쓴 한시를 보았다. 그의 시 해설 옆에는 기·세 ·사에 대한  고봉의 마지막 말씀이 적혀 있다.

  빙월당의 기둥 8개에는 한문 주련이 붙어 있다. 이 주련의 내용들은  고봉이 쓴 권학문 시이다.

책을 지고 스승 찾아 높은 암자 오르니 / 尋師負笈上高菴
창문에 비치는 해 그림자 달리는 말과 같네 / 牕裏羲光駕走驂
오늘 힘쓰지 않으면 명일도 마찬가지 / 今若不勤明又此
돼지와 용의 다른 날 한탄을 어찌 견디랴 / 猪龍他日恨何堪

삼천 명의 제자 적은 것이 아니지만 / 三千弟子不爲少
당에 올라 방에 든 이가 몇 사람이나 있을꼬 / 入室升堂有幾人
정사와 문장 이것 모두가 말단의 공부라 / 政事文章皆是末
예나 지금이나 오직 덕행 있는 사람을 말하네 / 古今唯說德行人


원래 이 시는 두수가 더 있다.   이 시를 모두 소개하여 본다.

문장의 화려함은 봄꽃이 곱고 / 文章灼灼春花艶
부귀의 넘실댐은 냇물이 멈췄네. / 富貴盈盈川水渟
서리가 내리고 물막이 터지면 어디에서 찾으랴 / 霜落梁分何處覓
달 밝은 가을밤에 옥병이 맑네. / 月明秋夜玉壺淸

만 권의 서책을 읽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면 / 讀書萬卷未了義
평탄한 언덕에 말을 달려오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 何異平原走馬回
한 글자의 심오한 뜻 그 누가 능히 해득하랴 / 一字精微誰解得
성현은 학문을 귀히 여기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네. / 聖賢貴學不貴才


  장판각에서  

   빙월당 강당에서 기규철씨와 강기욱씨를 만났다. 그리고 장판각을 구경한다. 장판각에는 고봉선생의 문집 목판과 석판등이 보관되어 있다. 먼저 목판  [논사록] 중에서 선조임금에게 첫 강론한 1567년 10월23일 석판을 보았다. 여기에 조광조와 송인수 이름이 보인다. 퇴계와 고봉이 13년간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양선생왕복서도 구경하였다. 월봉서원강당과 유영루 현판도 보관되어 있다. 이런 귀중한 사료들을 보게된 것은 큰 영광이요 기쁨이다.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한곳에서 한시가 적힌 편액 하나가 나왔다.  바로 고봉의 문인 유근의 시를 적은 편액이다. 유근(柳根 1549~1627)은 1572년(선조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1587년 이조 정랑으로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 해 일본의 승려 현소(玄蘇)가 사신으로 왔는데, 문장에 뛰어나다는 이유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그를 맞았다.  


삼가 고봉 선생 서원에 제하다  


고봉 선생 학문은 연원이 있나니 / 高峯爲學有淵源
퇴계 선생을 사사하여 남김없이 토론했네. / 師事陶山極討論
처음에 타고났던 이 성에 대해 / 凡此厥初成者性
도의 근원에서부터 진정 그 까닭을 탐구했다네. / 苟求其故道之原
이기를 천명한 글 아직도 남아 있고 / 闡明理氣書猶在
허령을 함양하여 호를 존재(存齋)라고 하였네. / 涵養虛靈號曰存
이제 광산에 이르러 사우를 참배하니 / 今到光山拜祠宇
늙은 이 몸 일찍이 문하에 올랐음 일세 / 白首曾是忝登門

이 시는 유근이 노년에 고봉 선생 사우를 참배하고 그 소회를 적은 시이다. 시구에서 허령(虛靈)은 명덕(明德)을 말한다. [대학장구] [명덕장(明德章)]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는 것으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를 수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허령불매는 마음에 찌꺼기나 가린 것이 없어 사물을 환하게 비추어 보는 것이다.

편액 마지막 부분에 정사 丁巳라 적혀 있다. 연도를 환산하여 보니 1617년이다.



다시 고봉 묘소에서  


   9월 중순 다시 고봉 묘소를 간다. 고봉 묘소 가는 길은 처음 고봉문학기행 연재를 시작한 6월과는 사뭇 다르다. 철학 산책로 길을 닦고 있다. 묘소 가는 중간에 표시석이 하나 있다. 거기에 고봉 선생이 유일하게 쓰신 시조가 적혀 있다.


   호화코 부귀키야 신릉군 信陵君만 할 까 마는
백년이 못하여서 무덤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엇 하리오.


묘소 앞에는 휴식처도 만들어 졌다. 정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변에 배롱나무도 심어져 있다.

묘소에서 선생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 선생의 흔적 찾기 기행이 오늘로 마무리됨을 고하였다. 그러면서 아쉬움을 고백하였다.

   식영정, 면앙정, 소쇄원, 요월정, 풍영정, 칠두정등 선생께서  계산풍류를 즐기던 곳도 제대로 못 둘러보고, 무등산, 월출산, 지리산등 선생이 유람한 산도 제대로 못 찾아보고, 송순, 김인후, 이항, 정지운, 양응정, 이후백, 정유일, 박순, 김계, 김계휘, 김취려, 우성전, 김언거, 정철, 양사기, 유희춘, 고경명등 선생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였음을 아뢰었다. 그렇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다시 길을 떠날 것임을 다짐하였다.
  
   고봉 기대승. 선생은 호남 정신의 자존심이다.  앞으로 그에 대한 심도 있는 학문적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면 한다. 또한 고봉 선생을 대중들에게 많이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내년에는 고봉 선생의 흔적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면 한다. 나도 그 답사 모임에 참여하여 고봉선생을 알리는 데 일조를 하련다.  

   남도의 역사, 호남 인물을 아는 일은 그 자체가 호남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다. 고봉 선생을 아는 일 또한 호남의 자존심을 찾는 일이다.



              (2009. 9.21.  광산구청 연재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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