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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성리학자 고봉기대승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8년간의 학문 논쟁, 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2.jpg
위치 광주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

 

고봉 기대승 (1527∼1572)

아호는 고봉(高峰)이며 1527년(중종 22년) 광산구 임곡관내 신룡동에서 학자 기진(奇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1519년, 사림파를 이끌고 정치개혁을 시도하던 조광조가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기묘사화)이 발생하는데, 이에 연루되어 희생된 사람 중에 ‘기준’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기준’은 기대승의 작은아버지로 기대승의 부친 ‘기진’은 동생 ‘기준’이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하여 터 잡은 곳이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이다.


사단칠정논변, 퇴계 이황과 세대를 넘어선 철학 논쟁

고봉선생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점잖았으며 매우 총명하여 책을 볼 때는 옆줄을 한꺼번에 읽어내려 갔다고 한다. 나이 15세에는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예법(禮法)과 산수(算數)에 관한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 보게 되며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첫 만남의 자리에서 고봉은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이황은 고봉 보다 26세 많은 58세였고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반에 고봉 기대승은 과거 시험을 앞두고 있는 젊은 선비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 이후, 고봉의 의견에 고심하던 퇴계 이황은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내는데 이것이 13년간 이어진 퇴계와 고봉 간에 이뤄진 편지 대화의 시작이었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단칠정논변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기론(理氣論)은 이(理)와 기(氣)의 원리를 통해 자연 ·인간 ·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기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도덕적 가치(중심)를 세우려 했다.

이기(理氣)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 것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다. 사단(四端)이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나오는 네 가지 단초(端初)이며 칠정(七情) 희로애락애오욕(喜怒愛樂哀惡慾)의 일곱 가지 인간의 감정을 말한다. 퇴계 이황은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마음씨로 이(理)에서 발현 되고, 칠정(七情)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마음을 기(氣)로 보았는데 이것을 이기이원론(理氣一元論)이라고 한다.

이런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고봉은 반박한다. 인의예지로 나타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四端)과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나온 희로애락애오욕(喜怒愛樂哀惡慾)의 칠정(七情)은 서로 섞여 있다고 보았다. 결국 이(理)와 기(氣)는 분리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은 섞여있는데 이것을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라고 한다.

퇴계와 고봉은 8년 동안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 논변을 벌이는데 이 두 사람의 사상적 교류는 당대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선은 한 단계 더 높은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퇴계 이황은 고봉 기대승 보다 26년이나 연장자였으나 그들의 편지를 보면 퇴계는 고봉을 제자가 아닌 학우로 인정하고 예우하였으며, 고봉은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관계가 모호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퇴계와 고봉이 서로를 선비로써 존중하고 두 사람의 학문적 진정성과 깊이가 종이 위에 쓰인 글씨에 머문 것이 아니라 삶에도 베여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진정한 시대의 선비

고봉의 서슴지 않는 비판과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이 관직과는 맞지 않았는지 결국 44세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결심한다.

“임금이 정사를 소홀히 하거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근본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함부로 쓰고 백성이 고루 살도록 하는 정치를 않으면 왕의 혜택이 밑에 이르지 못합니다. 백성이 편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고 백성이 만족하면 군주는 부족함이 없으리다.”

이는 낙향을 만류하는 선조에게 남긴 고봉의 말로 당시 흔들리는 나라의 덕(德)을 걱정하는 고봉 기대승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하지만 고봉은 귀향 도중에 볼기에 난 종기가 악화 되어 그만 객사하고 만다. 고봉의 별세 뒤, 평소에 고봉의 경연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선조는 고봉이 경연에서 남긴 말을 책으로 엮게 되는데, 이 책이 바로 <논사록(論思錄)>이다.

"옛 말에 백성에겐 먹는 것이 하늘이라 했습니다. 살아가는 이치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니 하루도 재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다만 재물이 위주가 되면 이욕(利慾)이 생겨 다툼과 송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덕을 근본이라 이른 것입니다."

"천하의 일에는 시비(是非)가 없을 수 없으니 옮고 그름을 분명히 해야 인심이 복종하여 정사가 순조로워집니다."

"일시적으로 이를 엄폐하고 사람들을 처형해 입을 막는다 해도 시비의 본심을 끝내 없앨 수 없습니다."

"나라는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이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군주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백성 생각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이 한다면 선한 정사(善政)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논사록에서 고봉이 강조했던 건 나라의 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그에 맞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위해서는 군주도 인격 수양을 위해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스스로를 다스리고 난 뒤, 백성을 중심으로 통치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논사록에 기록된 고봉이 주장은 오늘날 이 시대에도 가감 없이 생각하고 실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봉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의 논변을 통해 조선의 독자적인 성리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한 나라의 군주의 신하로써도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으며 광산구의 월봉서원(月峰書院)과 빙월당(氷月堂)에 배향되있다.

고봉 기대승 묘소 (7).jpg

고봉 기대승의 묘소, 백우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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