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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8회 충 ․ 효 ․ 열의 양씨 삼강문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8회 충 ․ 효 ․ 열의 양씨 삼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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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박산마을 입구에는 ‘양씨삼강문’이 있다.

안내판에는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신 양산숙과 그 가족 6명의 충(忠)․효(孝)․열(烈)을 기리기 위해 생원 홍탁의 상소로 1635년(인조 13년)에 세워졌다”고 적혀 있다.

 

정려각에는 삼강전 三綱傳 현판이 붙어있고, 안에는 충신 양산숙, 효자 양산룡과 양산축, 절부 節婦 양응정의 부인 박씨와 양산숙의 부인 이씨, 열녀 烈女 김광운과 임환의 처 양씨의 편액이 걸려있다.

 

먼저 충민공 忠愍公 양산숙 梁山璹(1561~1593)부터 살펴보자.

양산숙은 학포 양팽손의 손자이고, 송천 양응정의 아들이다. 양산숙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세상이 평탄하지 못한 것을 보고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나주 삼향리에서 살았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숙은 형 산룡, 아우 산축과 함께 통곡하면서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나라가 이렇게 위태로우니 이제 저희 형제들은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합니다.”하였다.

 

이 때 어머니 박씨 부인은 “우리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온 가문이다. 나라를 구하려다 죽으면,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이니 너희는 있는 힘을 다하라”하였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이다.

 

양산숙은 형 산룡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모집하여 나주의 김천일을 맹주로 모시고 거병하여 양산숙은 부장이 되고 양산룡은 운량장이 되었다.

 

 

6월 하순에 의병장 김천일은 수원 독성산성에서 기거하면서 전라병사 최원과 함께 왜적 15명을 베고 병기와 군마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는 양산숙으로 하여금 의주로 가서 선조에게 의병활동을 전하도록 하였다. 양산숙은 곽현과 함께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길을 달려서 7월 중순에야 압록강근처 의주에 이르렀다. 선조를 알현한 양산숙은 엎드려서 통곡하고 왜적의 형세와 전라도와 경상도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 아뢰었다. 주1)

 

 

이에 선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남쪽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지금 너를 보고서야 옛 강산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았구나.”하였다. 그러면서 선조는 양산숙에게 술과 약을 내리면서 "돌아가서 고경명과 김천일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선조는 양산숙에게 공조좌랑 벼슬을 내리고 곽현에게는 사축서 사축(司畜署 司畜) 벼슬을 제수하였다. 의병장 김천일에게 창의사, 고경명에게 초토사로 각각 임명하고 곽재우 등에게도 벼슬을 내리면서 전라도와 경상도에 내리는 교서도 주었다.

 

선조의 환대를 받은 양산숙은 눈물을 흘리고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감격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천리 먼 길, 임을 뵙고 이내 속 모두 다 여쭙고

나직이 전하시는 임의 말씀도 내 들었네.

뼈에 사무친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목숨 바쳐 임의 은혜 갚을 때가 바로 지금이리.

 

 

양산숙은 강화도에 있는 김천일의 진중으로 다시 돌아와서 임금의 교서를 읽었다. 교서를 들은 의병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양산숙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의주 행재소 소식을 전하였다. <장성 남문창의록>에는 양산숙이 장성남문 의병들에게 팔로의거소식을 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3년에 1월8일에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2월12일에는 전라도관찰사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다급해진 왜군은 4월18일에 군량 2만석을 그대로 두고 서울을 자진 철수하였다. 명군은 철수를 보장하여 왜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부산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격에 나섰다.

 

조선군은 경상도 의령에서 긴급 지휘관회의를 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이 주재한 이 회의에서 창의사 김천일은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고개를 돌렸다. 명나라나 조선 조정도 진주성을 비우자는 입장이었으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권율, 이복남 등은 운봉으로 후퇴했고 순변사 이빈은 산음으로, 곽재우도 창녕으로 돌아갔다. 여러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천일과 충청병사 황진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 호남 장수들은 진주성을 지키고자 진주로 향하였다.

 

6월14일에 창의사 김천일은 양산숙, 김상건과 함께 300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간 것을 필두로 황진 ․ 고종후 등이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호남의병은 3천500명 정도였다. 진주성 관군 2천500명과 합하면 모두 6천명이었다.

 

여기에서 왜군 상황을 살펴보자. 6월15일에 10만 명의 왜군은 김해와 창원에 집결했다. 6월18일에 왜군이 함안으로부터 정암나루로 건너오자, 홍의장군 곽재우는 형세가 불리해 후퇴했다. 권율·이빈·이복남 등도 남원으로 들어갔다.

 

6월19일에 전라병사 선거이·경기도 조방장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김천일에게 말하기를, “적의 군사는 엄청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어 군사 수가 크게 차이가 있으니 잠깐 물러나서 몸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김천일이 크게 노해 꾸짖었다. 그는 “호남은 우리나라의 근본이요, 진주는 실로 호남의 방패이니,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이는 바로 호남을 없애는 것이다” 하고,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사수하기를 다짐했다.

 

이어서 상주목사 정기룡이 명나라 유격 왕필적과 함께 진주성에 당도했다. 김천일은 예를 표한 뒤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6월 20일에 적군의 선봉 기병 200여 명이 진주성 외곽 마현에 나타났다. 복수의병 선봉장 오유와 적개의병 선봉장 이잠이 뛰쳐나가서 적병의 목을 말안장에 차고서 돌아왔다. 성안의 군사들은 환호했다.

 

이를 본 명나라 왕필적은 의기가 대단함을 치하했다. 왕필적은 “유총병의 군사가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했으니 경들은 잘 방어를 하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는 이후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밤에 양산숙이 남강을 통해 간신히 성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김천일은 양산숙을 상주에 있는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은밀히 보냈다. 김천일은 조급히 유정을 만난 결과를 묻자 양산숙은 침울하게 말했다.

 

“유총병에게 고종후 복수의병장이 써 준 글을 읽어 드렸더니, 유정은 문장마다 힘이 넘쳐나고 곧은 기개가 서려 있어 탄복했습니다. 심지어 유정은 글을 들으면서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고쳐 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유정은 지원군을 보내기는 어렵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일본과 명나라 간에 강화협상이 진행 중인 데다가 진주성을 쳐들어오는 왜적의 기세가 너무 커서 군사를 출동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주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명군도 조선군도 어느 한 사람 도와주지 않았다.

 

6월21일부터 진주성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6월29일에 성이 무너졌다. 오후 3시경에 성이 뚫렸다. 창의사 김천일 부대가 사력을 다했지만 버텨내지 못했다. 드디어 왜적은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해 피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김천일은 꿋꿋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겠다”하고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주2)

 

이 때 최경회는 죽음 앞에서도 삼장사 시를 읊었다.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성안의 백성들도 앞을 다퉈 남강에 투신해 시체가 강을 메웠다. 죽은 자가 6∼7만명이나 됐고, 성이 온통 폐허가 됐다.

 

9일간의 진주성 혈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호남의병들의 희생으로 전라도는 무사할 수 있었다. 왜군이 지쳐서 전라도를 침공 못하였다.

 

1593년 7월에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글을 남겼다. 그랬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였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었다.

 

다음으로 정려각 벽에 붙어 있는 효자 양산룡과 양산축, 절부 양응정의 부인 박씨와 양산숙의 부인 이씨, 열녀 김광운과 임환의 처 양씨 등 여섯 사람의 편액들을 살펴본다. 이들은 모두 1597년 정유재란 때 희생된 이들이다.

 

그러면 이들의 효과 열에 대하여 이야기 하여보자.

 

1593년 하반기부터 1596년까지는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협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그러나 협상이 깨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명령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이다.

 

159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을 먼저 제거하고 전라도부터 쳐들어가서 모두 참살하라고 지시 하였다. 이 작전은 성공하였다. 이순신은 투옥되었고,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몰살되었다. 8월16일에는 남원성이 함락되었고, 1만 명이 넘은 군관민이 죽었다.

 

왜군들은 전라도를 초토화하였다. 고니시 군대는 순천에 주둔하였고, 시마즈 부대는 장성, 나주를 초토화하고 해남으로 내려갔으며 다른 부대들도 전라도 지역에 주둔하였다.

 

백성들은 앞 다투어 산속으로 숨고 배를 타고 피난을 갔다. 나주 박호동에 살던 양산룡과 양산축 형제도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9월17일에 양씨 가족들은 배를 타고 서해바다로 나가려고 삼향포(무안군 몽탄)에 도착하였다. 배가 막 떠나려는 즈음에 수척의 왜선이 갑자기 들이닥쳐 포성이 하늘을 진동하였다. 9월16일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일본수군은 이순신의 조선함대를 찾으려고 무안, 함평, 영광 앞바다를 뒤지고 다닌 것이다.

 

화를 면할 수 없게 되자 양산룡의 어머니 박씨는 형제들에게 “나는 대부 大夫의 아내이다. 왜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온 가족들이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건지자 그녀는 오히려 화를 내며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데 건지면 무엇하겠느냐?”하고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양산룡과 양산축이 다시 어머니를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죽고 말았다.

 

양산룡의 아내 류씨와 누이동생 김광운의 아내도 함께 바다에 뛰어 들어 죽었다.

 

한편 양산숙의 아내 이씨와 양산축의 아내 고씨도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여종들이 건져냈다. 두 여인은 포구 앞 승달산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왜적들이 몰려오자 이씨 부인은 스스로 목에 칼을 꽂았다. 이씨의 자결을 목격한 왜적들은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나중에 이씨의 시신을 수습하여 보니 은장도가 그대로 꽂혀있고 남평의 신주를 등에 지고 있었다.

 

양산축의 아내 고씨부인만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고경명의 손녀이고 고종후의 딸인 고씨는 자기도 죽으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 이때 두 여종이 그녀를 붙잡고 울면서 소리쳤다. “아씨 이렇게 죽으면 안 됩니다. 아씨의 배속에는 아기씨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대로 목숨을 버리면 대가 끊깁니다. 이는 조상에 대한 큰 죄입니다.”

 

이러자 고씨부인은 갈대숲에 숨어 있다가 왜적이 물러간 후에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고씨부인이 낳은 유복자 遺腹子 아들이 바로 양만용(1598-1651)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양산룡의 딸이며 의병장 임환의 아내 양씨는 시가인 임씨 일가들과 함께 배를 타고 피난 가던 중에 나주 몽탄에서 왜선을 만났다. 왜군은 이들에게 ‘오늘은 살인을 안 할 것이니 여자들을 보내라’고 하니, 양씨부인은 몸종을 왜군에게 보냈다. 왜군은 여자를 한 명 더 요구하니, 양씨부인은 다른 사람들을 욕보이게 할 수 없다고 하고 자기가 왜선에 올랐다. 왜적들이 이에 만족하여 다른 가족들은 살려주고 배를 출발시켜 한참을 가자 양씨부인은 바다에 뛰어 들어 죽었다. 주3)

 

 

 

사진 1. 2 양씨 삼강문 입구

3. 정려각

4. 정려각 안의 충 ․ 효 ․ 열 편액

 

 

주1) 1592년 7월 24일자 선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는 양산숙과 곽현이 선조를 만난 기록이 적혀 있다.

 

주2) 양산숙의 신위는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한편 1593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공조 좌랑 양산숙의 졸기가 실려 있다.

 

 

양산숙(梁山璹)의 자는 회원(會元)으로 부윤(府尹) 양응정(梁應鼎)의 아들인데, 나주(羅州)에 살며 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그는 시사(時事)가 평탄하지 못한 것을 보고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나가지 않았다. 왜란 초에 군사 수백 명을 모집하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기병(起兵)하였는데, 행조(行朝)에 들어가 아뢰자, 그를 발탁하여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하였다.

그는 다시 김천일을 따라 진주에 이르러 김천일의 서신을 가지고 유정(劉綎)에게 가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의 사기(辭氣)가 강개하여 유정도 탄복하였으나 여전히 군사를 출동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적이 이미 성을 핍박하고 있었는데, 동행한 몇 사람은 모두 탈주하였다. 양산숙은 말하기를,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고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혼자만 죽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하고, 남강(南江)을 통해 성에 들어가니, 군사들이 모두 놀랐다. 성이 함락됨에 미쳐 양산숙은 헤엄을 잘 쳤으므로 그의 힘으로 충분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김천일과 함께 죽었다.

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정유년 변란 때 산에 숨었다가 적을 만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3) 1617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임진왜란 시 충신 54명, 효자 94명, 열녀 436명 총 584명이 수록돼 있는데, 열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부녀자 중에 절개를 지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고,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은 또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드러나게 칭찬할만한 자가 또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아! 선비들이 평소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할 때에는 누군들 내가 대장부라고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위태로움에 처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에는 도리어 부인네들보다도 못하였구나.

 

 

 

 

 

 

 

< 참고문헌 >

 

o 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 등,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김세곤,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4

o 김세곤, 임진왜란과 장성남문의병, 온새미로, 2014

o(사)광주시민의 소리 스토리텔링 사업단 ‘이야기통’, 박산마을 이야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2013

o 장산재, 국역 주해 송천집, 낭주인쇄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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