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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7회 송천 양응정, 대代를 이어 의義를 이어가다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7회 송천 양응정, 대代를 이어 의義를 이어가다

 

- 광주 임류정, 광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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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박산마을을 간다. 박산마을은 충 ․ 효 ․ 열 전통 마을이다. 입구에는 임류정 臨流亭과 양씨 삼강문 梁氏三綱門이 있다. 먼저 임류정부터 살펴본다.

 

‘물에 임하여 있는 정자’라는 의미의 임류정은 송천 松川 양응정(梁應鼎 : 1519-1582)이 지은 정자이다. 주1)

 

이 정자 기둥 위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있다. 여기에는 양응정과 교류한 기대승, 김인후, 고경명, 백광훈, 임억령의 시가 있다.

 

여기에서 고봉 기대승(1527-1572)의 한시를 읽어 보자. 시는 칠언율시이다. 주2)

 

백씨의 시에 차운하여 공섭에게 보내다 (공섭은 양응정의 자이다.)

次伯氏韻 呈公燮

 

홀로 긴 두레박줄 가지고 샘물을 길으며

사람 없다고 곧 거문고 줄 끊지 않네.

시험 삼아 양장의 백팔 굽이 밟아보고

마침, 붕새의 날개 따라 삼천 리 물을 박차리.

 

獨將脩綆汲寒泉

不爲無人便絶絃

試躡羊腸盤百八

會隨鵬翼擊三千

 

이 시는 고봉 기대승과 송천 양응정이 늘그막에 교우한 것을 그리고 있다. 고봉이 양응정을 백씨라 한 것은 그 보다 나이가 8살이 많아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고봉은 양응정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고봉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절현 絶絃은 중국 춘추시대(BC 770-403)에 가야금을 잘 탔던 진나라 백아 伯牙의 고사이다. 그는 가야금 음의 가락을 가장 잘 알던 벗 종자기 鍾子期가 죽자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이제 없다 하여 가야금 줄을 모두 끊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 흔히 지음 知音이라 하면 가장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를 칭하기도 하는 데 고봉과 송천의 관계를 지음 知音으로 표현한 것 같다.

 

‘양장(羊腸)의 백팔 굽이’는 매우 험준한 고개를 의미하는데, 세상살이가 백팔 양장처럼 험난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명일통지 明一統志>에 의하면 양장령 羊腸嶺은 중국 소주부 蘇州府 천평산 天平山 남쪽에 있는데 염소 창자같이 구불구불하므로 그 이름이 되었다 한다.

 

‘붕새의 날개 따라 삼천리 물을 박차리.’는 붕정만리 鵬程萬里의 원대한 뜻을 품었다는 말이다. <장자>의 ‘소요유 逍遙遊’에 보면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가 일어 삼천리나 박차고,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여섯 달 동안 9만리나 날아오른 뒤에야 내려와 쉰다.”고 적혀 있다.

 

이는 송천이 붕새처럼 큰 포부를 품었음을 은유하고 있다. 이 구절을 음미해 보면 고봉이 송천을 큰 인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2수를 읊어보자.

 

들녘 정자에서 시구 얻으니 총채에 바람 일고

강가의 누각에서 술잔 돌리니 달은 자리에 가득하네.

거칠어 공부 못함 스스로 부끄러워

우연히 이웃 만나 망년교를 맺었네.

 

 

野亭得句風生麈

江閣傳盃月滿筵

自愧狂疎功力缺

偶因隣曲忝忘年

 

 

이 시는 임류정에서 같이 술 마시며 회포를 푸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늦게야 만나서 망년교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3)

 

 

양응정은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던 해, 능주 도곡면에서 태어났다.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셋째 아들이었다.

 

양응정이 다섯 살 되던 해, 양팽손은 세상이 싫어 화순 쌍봉사 근처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한 칸 집을 다 짓자 학포는 벽에다 큰 붓으로 ‘문왕의 아들로서 무왕이 태어났도다. 학포 양팽손의 자식 양응정’이라고 적었다.

 

양응정은 아버지 양팽손에게 공부를 배웠다. 양응정은 1553년 그의 나이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1555년(명종10년)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70척의 배를 이끌고 달량포(영암의 한 포구)를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장흥군수가 전사하고 영암군수가 포로가 되는 등 국방에 구멍이 크게 뚫리었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호조판서 이준경을 급파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후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비변사를 설치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556년 2월 명종 임금은 모든 관리들에게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적어 내라고 하였다. 양응정은 이 시험에 장원을 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는 승진하여 이조좌랑에 오른다.

 

그런데 그는 기개가 너무 강하여 굽힐 줄 몰랐다. 명종 비 심왕후의 외삼촌 이량에게 밉게 보여 관서, 관북평사로 발령이 난다. 이때부터 그는 외직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된다. 양응정은 자신을 “나는 글 쓰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다만 센 활로 오랑캐를 쏘아 마칠 줄을 알 뿐이다.”라고 자탄을 한다.

 

나중에 택당 이식(1584-1647)이 오평사영 五評使詠 시에서 ‘유명한 양공 부자는 산골짜기를 울리고 다니는 호랑이였네. 오색의 붓을 던져 버리고 활을 당겨 서쪽 오랑캐를 쏘려 했네.” 라고 양응정을 평한 것도 그가 외직에 머문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었다.

 

1558년에 양응정은 다시 내직으로 들어간다. 이 때 그는 정사룡(1491-1570)과 함께 별시의 고시관이 된다. 양응정은 '천도책(天道策)'을 시험문제로 낸다. 이 문제는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기상의 이변에 대한 이치를 찾는, 이름 그대로 하늘의 도에 관한 것이었다.

 

'천도책' 시험문제는 이렇다.

 

'하늘의 도(天道)란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떠다니며 한번 낮이 되고 한번 밤이 되기도 하는데,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한 것은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간혹 해와 달이 한꺼번에 나와서 때로는 겹쳐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략)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각각 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기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 가지의 변화가 되는 것인가. 만일 올바른 길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기가 어그러져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이 잘못된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아니하며, 눈과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아니하고 모진 바람과 궂은비가 없이 각각 그 진리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것인가.'

 

이 시험문제에 대하여 별시에 응시한 율곡 이이(1536-1584)가 유창하게 답안을 쓴다. 그가 쓴 답안의 요지는 이기합일(理氣合一)과 천인상감(天人相感)이다. 즉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기가 바르면 천지의 기도 역시 바르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야 천지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지가 안정되려면 덕 있는 군주가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고 끝맺는다.

 

천도책은 명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중국의 사신이 이를 보고 “천하문장의 책제이요, 일대현사의 답안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천하문장이 낸 시험문제이고 일대의 현명한 선비가 쓴 답안이라는 것이다.

 

14년간 내리 정승을 한 사암 박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공섭(양응정의 자)의 책제는 일세의 문장이며, 숙헌(이이의 자)의 답안은 실로 궁리의 학문이다. 만약 처지가 뒤바뀌어 공섭이 응시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답은 이와 똑같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응정은 1567년부터 1569년까지 3년간 광주목사를 하였다. 이때의 선정비가 광주공원에 세워져 있다. 선정비 앞면에는 교영안민 敎英安民, 후속o(1자 안 보임)폐 厚俗o弊 라고 적혀 있다. “영재를 교육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고, 풍속을 두텁게 하고 ... (1자 멸실로 해석이 어려움)”하는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1570년에 양응정은 진주목사를 하였다. 이후 그는 경주부윤을 하다가 1574년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고향 박산으로 돌아왔다.

주4)

 

1576년에 양응정은 미암 유희춘(1513-1577)의 신원으로 의주목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 때 영광군수 고죽 최경창(1539-1583)이 그를 찾아온다. 송천이 최경창에게 보낸 시를 읽어 보자.

 

최고죽에게 보냄

 

삼년이나 못 본 것이 서로의 한이더니

향기로운 술병 메고 정 못 겨워 찾아왔네.

온갖 꽃 피었다가 지고 난 뒤에

강변에 비 맞은 풀은 푸르기만 하여라.

 

고죽 최경창은 양응정의 제자로서 서울에서도 잘 어울렸다. 그는 손곡 이달, 옥봉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 三唐詩人으로 알려져 있다. 주5)

 

 

한편 송천이 지은 시중에 ‘여종 소합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시 悼婢蘇合’가 있는데 여기에는 하서 김인후와 고죽 최경창이 등장한다.

 

먼저 시부터 음미하여보자.

 

늘 하서공의 칠석부를 외우더니

칠월칠석날에 돌아가고 말았구나.

맑은 마음에 재주 있는 너를

어디 간들 다시 생각나지 않으랴

 

 

每誦河西賦 매송하서부

還從七夕歸 환종칠석귀

明心將素質 명심장소질

何處更依依 하처경의의

 

양응정은 이 시의 1,2구에서 여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3,4구에서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런데 송천은 이 시에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아 놓았다.

 

그녀는 가사로 서울에서도 이름났으며, 칠석부(七夕賦)를 잘 외웠다. 고죽 최경창이 그녀를 극진히 아껴주었는데 나이 열일곱에 칠월칠석날 죽었다.

 

여기서 칠석부 七夕賦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그의 나이 19세 때 성균관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한 시이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55구에 이르는 장편 노래이다. 그 당시에 이 노래는 너무나 유행하여 장안의 기생들이 앞 다투어 읊었다고 한다. 주6)

 

여종 소합도 양응정과 최경창이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자주 칠석부를 읊었다. 그리고 기생 홍랑과의 애절한 사랑을 한 풍류객, 고죽은 평소에 여종 소합을 극진히 아껴주었나 보다. 주7)

 

송천 양응정은 문장에 능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 시절 팔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호남의 대문장가 10걸 중 한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1577년에 양응정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간 이후 다시 대사성 벼슬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아예 은퇴한다.

 

그는 박산마을에서 양산룡 ․ 양산숙 등 아들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병법도 가르쳤다.

한번은 군사훈련도를 가르치면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나라를 지키는 자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고, 문무의 관리들은 맡은 일을 게을리 하고 세월만 보내며 환난에서 벗어날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다. 남쪽의 근심이 멀지 않는데 나야 그 환난을 보지 않을 것이나 너희들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배운 것을 게을리 하지 말고 잘 대비하라” 하였다. 송천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응정의 아들 양산룡과 양산숙은 의병으로 나섰다. 특히 양산숙은 선조로부터 공조좌랑 벼슬을 받고 선조의 교서를 전달하였으며 1593년 6월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양팽손, 양응정, 양산룡과 양산숙. 이들은 대를 이어 의를 지킨 사람들이다. 호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사진 1. 임류정 전경

2. 임류정에 있는 고봉 기대승 시 편액

3. 광주공원에 있는 양응정 선정비

 

주1) 양응정은 중년에 능주 월곡에서 나주(지금의 광산광역시 광산구)박산마을로 옮겨와 임류정과 조양대를 짓고 뒤 뜰에는 대나무를 심고 앞 냇가에는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양응정의 호 송천 松川도 박산마을 앞 ‘강가의 소나무’란 의미이다.

 

주2) 이 시는 기대승과 김인후 ․ 백광훈의 시가 있는 편액에 적혀 있다. 임류정에 걸려 있는 편액중 김인후, 임억령등의 시는 ‘박산마을 이야기’(2013년) p44- 54를 참조 바람.

 

주3) 임류정 편액에는 없지만 양응정과 기대승이 잘 어울린 것은 기대승이 임류정 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임류정에서 공섭이 화운하기에 다시 차운하다

臨流亭公燮和韻 復次之

 

소나무 가지 끝에 맑은 달 유유히 떠오르니

술잔 잡고 임류정에서 모든 걱정 흩트리노라

인간 세상에 몇 번이나 영화와 근심을 보았던가.

술 취한 중에도 이 인생이 덧없음을 알겠네.

 

松梢淸月上悠悠

把酒臨流散百憂

人世幾看榮又悴

醉中渾覺此生浮

 

이 시는 <고봉집>에 실려 있다. 고봉과 송천이 같이 술 마시고 임류정에서 노는 모습이 역력하다.

 

주4) 선조실록 1574년 2월 5일 기사를 참조 바람

 

주5) 양응정의 제자들 중에는 정철, 박광전, 최경회, 최경창, 백광훈등이 있다.

 

주6) 양응정은 그보다 나이가 9살 위인 고향 선배 하서 김인후를 매우 존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의 <성옹지소록>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묘(仁廟 인종(仁宗))는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오자 임금이 승하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귀가하였는데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자가 매우 많았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났는데, 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여 그의 말을 공손하게 받들면서 감히 한 마디도 못하였다. 공의 앞에서 물러 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을 감탄하면서, “후지(厚之 김인후의 자)는 지금의 안자(顔子)이다.”하였다.

 

한편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임류정에도 양응정이 김인후와 주고 받은 시가 걸려 있다.

 

주7)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이 시조는 최경창과 사랑을 한 함경도 홍원 기생 홍랑의 시조이다.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구림마을 고죽관에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흔적이 있다.

 

 

 

< 참고문헌 >

 

o 국사편찬위원회, 명종 ․ 선조실록 등,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o 기대승, 고봉집,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o 김세곤,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뉴스투데이, 2006

o 김세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온새미로, 2012

o(사)광주시민의 소리 스토리텔링 사업단 ‘이야기통’, 박산마을 이야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2013

o 장산재, 국역 주해 송천집, 낭주인쇄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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