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회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논변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퇴계와 고봉에 대하여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신촌 마을에 도착하였다. 신촌 마을은 기씨 집성촌이다. 나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걸어서 오층 석탑이 있는 탑골로 간다.  시골길을 걸으면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때에 따라 ‘사칠논변’이란 약칭을 쓰기도 함]에 대하여 생각한다. 이 논변은 조선유학사에 있어서 가장 큰  철학 논쟁 사건이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심오한 논쟁이며, 독창적인 조선 주자학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단칠정 논변은 1559년 1월 5일에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고봉은 1559년 8월에 퇴계에게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후 고봉과 퇴계는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여 년 간 격렬하면서도 심오한 사단칠정논변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면 먼저 사단칠정의 개념부터 알아보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을 함께 타고 태어났다. 사단{四端}은 인간이 갖는 본성 중에 이성적{理性的}본성을 말하는 데, 이는 맹자가 성선설의 입장에서 주장한 것으로  인{仁}의 단{端}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함을 앎], 의{義}의 단{端]인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앎], 예{禮}의 단{端}인 겸양지심[{謙讓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지{智}의 단{端}인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을 사단{四端}이라 한다. 한편 칠정{七情}은 인간이 나면서 가지고 있는 감성적 본성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인간의 일곱 가지 감성인 희[{喜} : 즐거워하는], 노[{怒} : 노여워하는], 애[{哀} : 슬퍼하는], 락[{樂} : 즐기는], 애[{愛} : 사랑하는], 오[{惡} : 미워하는], 욕[{欲} : 욕심을 부리는]을 말하는 데, 칠정을 희노애구[{懼}]: 두려워하는] 애오욕으로 말하기도 한다.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변의 발단은  추만 정지운(1509-1561)이 제작한 [천명도설 {天命圖說}]에서부터 시작한다. 천명도설은 주자학의 여러 이론을 알기 쉽게 하나의 도형으로 그린 것에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것인데 여기에는 천명, 심성, 오행, 이기, 사단 칠정, 존양, 성찰 등 성리학의 핵심명제가 정리되어 있다. 원래 이것은 그의 동생인 정지림에게 성리학의 핵심을 알기 쉽게 가르치기 위하여 1538년경에 만들어졌다 한다.

그런데 정지운은 1553년 10월에 당시 대사성인 퇴계를 서울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모두 집이 서울 서소문 근처였다. 추만은 퇴계를 만나서 자기가 작성한 [천명도설]중에 사단칠정에 대하여 퇴계에게 자문을 구한다. 이에 퇴계는 추만이 “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 [사단발어리 칠정발어기 {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한 것을 “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 [사단이지발 칠정기지발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쳐 주었다. 그 후 정지운은 이황이 감수한 [천명도설]을 발간하였고 이 책은 당시에 선비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고봉이 정지운을 만난 것은 1558년 8월이다. 그는 그 해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면서 장성에 사는 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와 태인에 사는 일재 이항[1499-1576]을 만나서 태극도설을 비롯한 성리학의 근본 주제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고 이 자리에서 [천명도설]을 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8월 중순에 경기도 행주에 있는 선영에 성묘를 갔다가 고양에 사는 정지운을 만났고  두 사람은  [천명도설]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고봉은 그 자리에서 퇴계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것 같다.

한편 고봉은 1558년 10월에 과거시험 문과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한 후에 퇴계를 서울 서소문 퇴계 자택에서 만났다. 이 때 고봉은 퇴계의 사단 칠정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퇴계는 당대에 가장 존경을 받는 58세의 원숙한 수퍼스타 성리학자로서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국립대학교 총장]이었고, 고봉은 이제 갓 과거에 합격한 32세의 새파란 호기심 많은 열혈청년이었다.


그러면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논변을 일자별로 정리를 하면 [표1]과 같다.
[첨부물 참조]

[표1]에 따라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변 과정을 살펴보자.

1559년 1월 퇴계는 먼저 고봉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가 바로 사단 칠정논변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퇴계는 고봉과 만난 이후 사단칠정에 대한 그의 해석에 고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핵심을 한 번 읽어 보자

퇴계가 고봉에게 준 글,  절략{節略}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에도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마는, 그대의 논박을 듣고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단{四端}이 발{發}하는 것은 순리{純理}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善}하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은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선{善}ㆍ악{惡}이 있다.”라고 고쳤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봉은 퇴계의 이 편지에 대하여 1559년 3월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을 써 놓고 서울에서 퇴계를 만나서 논의를 하려고 하였는데, 퇴계가 영남 안동으로 내려가자 그 해 8월에 퇴계에게 편지를 보낸다.

고봉은 이 편지에서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인데 사단은 이로 칠정은 기로 분리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논리를 편다. 또한 이는 기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재료여서 본래 구분되기는 하나 실제 사물에 있어서는 혼재되어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했고,

맹자{孟子}가 “측은{惻隱}한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羞惡}-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의 마음은 의{義}의 단서이고, 사양{辭讓}의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是非}의 마음은 지{智}의 단서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정{性情}에 관한 이론으로서 옛 유학자들이 다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연구해 보건대, 자사의 말은 그 전체를 말한 것이고, 맹자의 논{論}은 그 일부분을 떼어 낸 것이었습니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아직 발현하기 전에는 그것을 성{性}이라 하고, 이미 발현한 뒤에는 그것을 정{情}이라 하는데, 성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지만 정에는 선ㆍ악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만 자사와 맹자가 강조하는 것이 서로 다른 까닭에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게 된 것이지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퇴계는 1559년 10월에 고봉에게 상당히 장문의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그는 사단 역시 정이라는 고봉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은 근원이 다르다고 한다. 즉 사단은 본연지성에 근원하고 칠정은 기질지성에 근원한다는 것이다.

1560년 8월, 고봉은 다시 퇴계의 주장 하나하나를 12조목으로 나누고 이를 철저히 분석한 소책자를 보낸다.  고봉은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논의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간단하게 도식화{圖式化}하면 마치 두 가지의 대별되는 정이 있는 것 같고, 정에 두 가지의 선이 있어 하나는 이에서 발원하고 다른 하나는 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고봉의 편지를 받아 본 퇴계는 더욱 심사숙고한다. 그리고 1560년11월에 퇴계는 고봉의 주장에 대한 답변을 적은 소책자를 보낸다. 여기에는 자기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 자기가 잘못 안 것, 자기 주장과 근본적으로 견해가 다른 것등으로 분류를 하고, 자기가 잘못 안 것은 잘못 알았다고 솔직히 시인을 한다. 참, 큰 선비다운 태도이다.

그러면서 사단칠정을  “말을  타고 가는 사람”에 비유한다. 즉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는 이기호발설 {理氣互發說}을 편다.  퇴계의 편지 일부를  읽어 보자.


옛사람이 말을 타고 드나드는 것으로써 이{理}가 기{氣}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은 참으로 좋은 비유입니다. 무릇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이 서로 따라야 하며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비유를 가리켜 어떤 이는 넓게 보아 ‘간다’는 사실만을 말하니, 사람과 말이 모두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사단ㆍ칠정을 혼합하여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이 간다.’는 것만 가리켜 말하니, 이 경우 말{馬}까지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가는 것이니, 사단이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말이 간다.”는 것만 가리켜 말하니, 이 경우  사람까지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이니, 칠정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내가 분별하여 사단ㆍ칠정을 말하는 것을 보고는 매양 혼합하여 말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공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이 “사람이 간다. 말이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칠정을 기의 발현이라고 말한 것을 보고는 이의 발현이라고 우깁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반드시 사람도 간다고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또 내가 사단을 이의 발현이라고 말한 것을 보고는 또 기의 발현이라고 역설하니, 이는 어떤 사람이 “사람이 간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반드시 말도 간다고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자 朱子가 이른바 숨바꼭질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하여 고봉은 1561년 4월에 다시 세 번째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고봉은 퇴계의 주장인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理發氣隨 氣發理乘}]’를 상당히 진전된 이론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퇴계의 주장을 “정이 발할 때는 혹 이가 움직여 기가 함께 하기도 하고, 혹 기가 감응하여 이가 타기도 한다.[{理動氣俱 氣感理乘}]’로 고치는 것이 어떠한지를 편지에 쓴다.

그렇지만 고봉은 퇴계가 아직도 이기이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점에 대하여는 비판을 한다. 그는  주자가 “사단은 바로 이발{理發}이고 칠정은 바로 기발{氣發}이다.”고 한 것은 대설{對說}이 아니고 인설{因說}이라고 하면서, 대설은 곧 좌{左}와 우{右}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상대시켜 말함이고 인설은 상{上}과 하{下}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단 칠정은 인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달에 대한 비유하여 설명한다. 본연지성은 하늘에 있는 달이고 기질지성은 물에 뜬 달이다. 그런데 물에 뜬 달은 물이 맑은지 흐린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선과 악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천지의 성{天地之性}은 비유하자면 하늘에 있는 달{月}이고, 기질의 성{氣質之性}은 비유하자면 물속에 있는 달입니다. 달이 비록 하늘에 있고 물에 비쳐 있어 다름은 있지만, 그 달은 하나의 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달은 달이라 하고 물에 비친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어찌 잘못이 있다고 말 할 수 없겠습니까?

(중략)

그런데 지금 하늘의 달은 달이라 하고 물에 비친 달은 물이라 한다면 어찌 그 말에 편벽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사단ㆍ칠정이란 것은 바로 이{理}가 기질에 떨어진 뒤의 일로서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흡사한데, 칠정은 그 빛에 밝고 어두움이 있는 것이나, 사단은 특별히 밝은 것입니다. 칠정에 밝고 어둠이 있는 것은 진실로 물의 청탁 때문이고, 절도에 맞지 않는 사단은 빛은 비록 밝지만, 물결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런 도리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한편 고봉은 지금까지의 논쟁을 두 사람의 짐을 한 말에 실고 가는 것에 비유하면서 논쟁이 첨예화 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 논쟁으로 어느 한쪽이 상처를 받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고봉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는 편지를 썼으나 붙이지 않았다. 퇴계 역시 논쟁이 더 치열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고봉의 편지를 받은 1년6개월 후인 1562년 10월 , 퇴계는 고봉에게 시 한 수가 적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이제 논쟁을 마무리를 하자는 의미로서 고봉이 지난 번 보낸 편지에 한 마리 말에 짐 실은 두 사람의 비유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을 일으켜 회답하기를 전처럼 용감히 하지 않고, 다만 공의 편지에 두 사람이 한 마리의 말에다 짐을 실었다는 비유로 인하여 희롱삼아 절구{絶句} 한 수{首}를 지었는데, 지금 이 시를 보냅니다.

짐 실은 두 사람 경중을 다투지만 / 兩人駄物重輕爭
높낮음을 헤아려 보면 이미 공평하네. / 商度低昂亦已平
이쪽을 누르고 저쪽으로 돌리자면 / 更剋乙邊歸盡甲
짐의 무게 어느 때나 공평해질까 / 幾時駄勢得勻停

한번 웃어주십시오. 하하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인 1566년 7월, 고봉은 퇴계에게 네 번째 편지에 후설과 총론을 지어 보낸다. 퇴계는 이에 흡족하며  1566년 11월6일에  퇴계가 고봉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냄으로서 8년간의 격렬한 철학 논쟁은 종료된다.  

  
지금까지  퇴계와 고봉간의 8년간의 사단칠정논변의 전개과정을 보았다. 그러면 두 사람의 주장을 간략하게  비교하여 보면 [표 2]와 [그림1]과 같다.
[첨부물 참조]

퇴계의 이론은 이와 기를 분리한다. 즉 이와 기를 대칭적으로 본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은 별개이라는 것이며 학자들은 이를 칠대사{七對四}로 이름 붙인다. 이황의 이론은 인간은 이성적{理性的}동물이라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즉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감정을 컨트롤 한다는 가치론지향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하여 인간은 이성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고봉의 이론은 논리지향적이다. 그는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하나의 현상 즉 존재론적 입장에서 본다. 즉 이와 기는 분리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은 섞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와 기는 인과관계를 가지며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소위 칠포사{七包四} 이론을 전개한다.    
      
한마디로 퇴계는 이기이원론을 고봉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는 데 이 입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퇴계와 고봉이 별세하신  후 얼마 있다가 다시 이기논쟁이 일어난다. 즉 퇴계의 영남학파가 주장하는 주리론과 율곡의 기호학파가 주장하는 주기론이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이에 따라 학파와 붕당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율곡 이이[1536-1582]는 고봉의 주기설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퇴계와 고봉의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변이 당시 조선 유학과 선비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먼저 조선 유학에 미친 영향을 보면 이 논쟁은 독자적인 조선 성리학의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철학 논쟁으로 조선 유학은 이, 기, 심, 성, 정, 본연지성, 기질지성등 성리학에 있어서 핵심용어에 대한 개념 정립을 하게 되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성찰은 향후 조선 유학사에 수많은 논쟁의 단초를 제기하였다.


다음으로 조선 선비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자. 사칠논변이 시작한 1558년부터 논쟁이 마무리된 1566년은  명종[1534-1567]이 임금을 한 시절이었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는 눈물의 왕이라고 야사{野史}는 말한다. 문정왕후는  중국의 서태후 만큼 조선 중기에 권력을 장악한 여걸로서 유학을 쇠퇴시키고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봉은사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로 임명할 정도로 그녀는 불교를 숭상하고 유학을 기피하였다. 또한 을사[]1545년], 정미사화[1547년]이후 조정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등 훈구대신들이 장악하여 신진 사림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하였고 벼슬에서 물러나 산림에서 재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은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하였고 깨어 있는 선비들은  두 사람의 편지를 서로 베끼어서 읽어 보고  이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칠논변으로 말미암아 유학을 하는 선비들이 열정을 가지고 성리학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선조가 즉위하자 훈구파가  사라지고 사림들이 정치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퇴계와 고봉간의 학문 논쟁에 대한 태도이다. 두 사람은 서로 논점이 달라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서로 신뢰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여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두 사람의  논쟁 태도에 대한  여헌 장현광[1554-1637]의 글은 압권이다.  

퇴계는 항상 몸을 거두어 감추고 겸손하며 깨끗하게 높은 절개를 지키는 도{道}로 스스로 지켰고,
고봉은 매양 발양{發揚}되고 직설적이며 준절{峻切}한 의리{義理}로 스스로 힘썼으니, 두 분의 기상이 합하지 않을 듯한데도 오직 독실히 믿어 의심하지 않고 서로 좋아하여 싫어함이 없는 뜻은 갈수록 더 친밀하고 정성스러웠다.

그리하여 때로는 누르고 때로는 치켜 주었으며, 권한 때도 있고 경계한 때도 있었다. 심지어는 조그마한 편지에 있어서도 서로 권면한 것이 모두 서로 붙들어 주고 채찍질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한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비단 고봉이 퇴계 선생에게 질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퇴계께서도 고봉에게 의뢰하여 유익함을 받은 것이 많았으니, 그 탁마하여 성취한 것이 깊다 하겠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1629년[인조 7년]에 쓰다.

장현광은 김굉필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1543-1620]의 문하생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인 정구는 영남 남인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데 그의 수제자가 바로 장현광이다.

장현광의 평은 한마디로 절차탁마{切磋琢磨}이다. 절차탁마란 ‘끊고 닦고 쪼고 갈다.’라는 뜻이다. 절차는 동물의 뼈나 뿔을 손질할 때 칼과 톱을 쓰고  줄이나 대패로 손질하는 과정을  탁마는 옥이나 돌 같은 광물질을 쪼고 가는 과정을 말하는 데, 그 출전은 [시경]책 위풍{衛風} 편에 있는 시 “기욱{淇奧}”이다.

저 기수{淇水}의굽어진 곳을 바라보니
푸르른 대나무가 무성하구나.
빛나는 군자여!
자르는 듯 다듬는 듯 하고{如切如磋},
쪼는 듯, 가는 듯하구나.{如琢如磨}.
위엄이 있고도 너그러우며
빛나고도 뚜렷하구나.
빛나는 군자여!
끝내 잊지 못하겠네.

瞻彼淇奧       {첨피기욱}
綠竹猗猗       {녹죽의의}
有匪君子       {유비군자}
如切如磋       {여절여차]
如啄如磨       {여탁여마}
瑟兮僩兮       {슬혜한혜}
赫兮咺兮       {혁혜훤혜}
有匪君子       {유비군자]
終不可諼兮    {종불가훤혜}


이 시는 원래 위나라 무공{武公}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시이다. 무공은 95세가 되어서도 항상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부지런히 나랏일을 돌보았다. 그래서 백성들이 강가에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의 아름다움에 비유하여 그를 칭송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대학]에도 [논어]에도 나온다. [대학]에는  지극한 선에 이르려면  절차탁마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글을 배우고 읽고 토론하면서 도학을 공부하고 [절차 {切磋} 스스로를 반성하여 수양과 덕을 닦아야 탁마{琢磨}하여야 군자가 된다는 것이다. [논어] 학이 편 15장에도 절차탁마 관련 글이 나온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논쟁 태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 학자, 정치가, 언론인, 논객들에게 정말 귀감이 된다. 죽비소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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