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회 낙암 가는 길에[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만남을 생각하다.]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월말에 아는 분과 함께 낙암{樂庵}을 찾아 나섰다. 신촌마을의 탑골 오층석탑을 지나서 산 중턱쯤 가다가 길을 찾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5월초에 다시 낙암을 찾았다. 이번에는 고봉 선생 종손 기성근 씨, 문헌공 문중의 기규철씨 그리고 고봉학술원 강기욱씨와 같이 동행하였다. 낙암은  용동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신촌마을의 뒷산인 낙암산(당시에는 고마산이라 하였음) 아래에 있다.


낙암은 1570년 5월에 지어졌다고 한다.

경오년(1570, 선조3) 5월에 고마산{顧馬山}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貧當益可樂}”는 퇴계의 편지 글에서 따온 것이다.

이 낙암이란 이름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570년 4월17일에  퇴계 이황(1501-1570)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난다.


(전략) 집에서 가까운 산기슭에 작은 초막을 새로 지어 노니는 곳으로 삼고자 하는 데 “낙{樂}자를 그 집의 이름으로 걸까 합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주신 편지에 있는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 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원하고 사모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입니다.  

산이 비록 깊지는 않습니다만 시야가 수백 리 까지 미치니 집을 다 지어 머물게 된다면 조용히 수양하는 데 딱 맞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학문에 힘쓴다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가 피어내는 흥취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밖에 또 무엇이 마음을 끌 만한 것이 있어 다시 이러저러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살펴 헤아려 주시고 비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략)  

경오 4월 17일 후학 대승 절하며 올립니다.

퇴계가 말한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 는 말은 [논어] 학이 편 15장에 나오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사는 것(빈이락, 貧而樂)’에서 유래한 것 같다. 자공이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사는 것(貧而無諂)이 어떠한가?’라고 공자에게 물었을 때 공자는 ‘그 정도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기는 것 빈이락{貧而樂}만 못하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  퇴계는 이 말을 더 강조하여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라고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고봉의 편지에서 “지난 번 주신 편지에 있는 말씀”이란  퇴계가 1570년 1월24일에 고봉에게 보낸 편지 글 중에 “이 소원(벼슬하지 않고 고향에서 지내는 것을 말함-필자 주)을 이루게 되면 산이 더욱 높아지고 물이 더욱 깊어지며 글이 더욱 맛이 있고 가난이 더욱 즐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는 구절을 말하는 데 퇴계는 그의 호 퇴계{退溪}가 의미하는 것처럼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물러나서 살기를 원하였다.      

한편 퇴계는 고봉의 이 편지에 대하여 1570년 7월12일에 답장을 한다. 그리고 낙암 기문과 액자도 써 주었다.

(전략)높고 넓은 곳에 땅을 얻어서 서실을 새로 짓고 학문에 마음을 다하는 즐거움이 그곳에 깃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낙{樂}자를 그곳의 이름으로 걸었으니 참으로 마땅하고 좋습니다. 한번 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그 즐거움이 어떠한지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후략)
  
1570.7.12 황은 절합니다.

낙암을 가면서 나는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만남을 생각한다. 퇴계와 고봉은 1558년 10월에 만난 이후 1570년 12월 퇴계가 죽을 때까지 13년간 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 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인 사단칠정논변 편지도 들어 있다.

고봉 기대승은  1558년(명종13년) 10월 퇴계 이황을 서울의 서소문에 있는 이황의 집에서 처음 만난다. 그 때 고봉의 나이는 32세이었고 퇴계는 고봉보다 26세 많은 58세 이었다. 그 당시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 총장급인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벼슬 없는 백면서생이었다.

이후 퇴계는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보자.

명언{明彦}에게 절하고 답함. 기 선달{奇先達} 앞

병든 몸이 문 밖을 나가지 못했는데 어제 찾아 주어 만나고 싶어 하던 소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몹시 고맙기도 하고 매우 부끄럽기도 하여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일 남행{南行}은 결정하셨습니까? 겨울철에 먼 길을 떠나는 데는 몸조심이 상책입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대업{大業}을 궁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황{滉}.

그런데 1559년 1월5일에 퇴계는 고봉에게 다시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사단칠정설에 대한 퇴계의 견해가 들어 있었다. 이를 보아 고봉은 퇴계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의문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퇴계는 몇 달간 심사숙고하여 고봉에게 답장을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고봉은 1559년 3월에 퇴계에게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후 고봉과 퇴계는 1566년 11월까지 8여 년 간에 격렬하면서도 심오한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한편 고봉과 퇴계와의 서신 교류는 단지 사단칠정의 논변만은 아니었다. 시작은 사단칠정논변으로 되었지만 퇴계와 고봉은 편지를 통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치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였으며, 인생 상담도 있고 시도 주고받았다. 물론 성리학의 주요 논제에 대한 궁금증도 편지로 주고 받았고 고봉이 퇴계에게 액자 글씨 등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하고 퇴계가 고봉에게 자신의 문집 판각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특히 퇴계는 매화를 좋아하여 107수나 되는 매화시를 지었고 문집도 만들었다. 매화는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로서 죽음을 앞둔 퇴계가 이질 때문에 설사를 하자 매화에게 미안하니 매화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한 것은 감동적인 이야기 이다. 퇴계는 매화시를 쓸 때 마다 고봉에게 보여주었고 고봉 또한 그에 화답하여 시를 지어 퇴계에게 보냈다.


1569년 3월4일 퇴계 이황은 서울을 떠나면서 고봉 기대승에게 매화 시 8수를 준다.  이 매화 시에 답한 고봉의 시를  한 수 감상하여 보자.
                            
고개 너머 차갑게 피어 있는 매화는
바로 적선{謫仙}이라.
고고한 향기와 나그네 자취가
각각 천성을 보전하였네.

어찌하면 달빛 아래서
우리 그윽한 회포를 열고
복희씨가 괘를 긋기 전의
이야기를 해 볼까.

嶺外寒梅是謫仙{영외한매시적선}
孤芳羈跡各全天{고방기적각전천}
何當月下開幽抱{하당월하개유포}
設到羲皇畫卦前{설도희황획괘전}

이 시는 퇴계가 준 8수중 제6수에 대한 고봉의 답시이다.

매화는  적선{謫仙}이라. 고고한 향기와 나그네 자취가 천성이네. 고봉이 퇴계의 성품을 이렇게 매화에 비유한 것이다. 적선은 죄를 짓고 인간세상으로 쫓겨 내려온 천상의 선인이다. 이 시에 나오는 복희씨는 주역의 8괘를 처음으로 만든 전설적인 인물로서 몸둥이는 뱀이고 얼굴은 사람이며, 소의 목과 호랑이 꼬리가 달렸다고 [열자]라는 책에 전한다.

원래 퇴계가 고봉에게 준 시 제6수는 이렇다

매화가 답하다

나는 포선으로부터 환골한 신선이요
그대는 돌아온 학이라 하늘에서 내려왔네.
서로 만나 한번 웃는 것 하늘이 이미 허락했으니
예천의 일 가지고 비교하지 말게나.

이황은 67세 정월에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져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그는 예천까지 갔다가 다시 올린 사직 상소가 윤허되어 도산으로 되돌아온다. 이 때 쓴 매화 시 두수 중 하나가 이 시이다. 이 시에서 포선은 송나라의 임포{林逋}[967~1028]를 말하는 데 그는 서호의 고산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처럼 기르고 [매처학자{梅妻鶴子}] 살았다 하며 임포의 시 “산 동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제  퇴계 이황에 대하여 알아보자. 퇴계 이황. 그는 천원 권 화폐에 있는 초상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조선의 유학자이다. 천 원 권 지폐 앞면에는 오른쪽에 ‘퇴계 이황[1501-1570]’ 이라고 적힌 작은 글씨와 함께 그의 초상화가 있고 왼쪽에는 위에 매화나무가 아래에는 명륜당이 그려져 있다. 화폐의 뒷면에는 도산서원으로 추측되는 산수화가 그려져 있고 산속의 집에는 선비 한사람이  있다.

먼저 백과사전에서 찾은 이황의 약력을 소개하여 보자.

이 황{李滉}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으나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 중에 전임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등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의 중책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고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하였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에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문집으로 [퇴계전서]가 있다.


매우 간략한 설명이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퇴계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퇴계는 1501년에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돌아가신다. 후처였던 그의 어머니는 전실 소생 아들과 자기가 낳은 아이를 키운다. 그는 숙부가 공부를 가르쳤는데 어릴 때부터 영리하였다 한다. 그는 가정적으로 불운하였다. 부인과 두 번 사별하였고, 장성한 아들도 혼인을 앞두고 죽었다. 그 아들과 정혼한 며느리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도록 허락하였다 한다.

이황은 벼슬을 하였지만 벼슬 할 뜻을 버리고 여러 번 낙향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그를 부르자 할 수 없이 벼슬을 하다가 다시 사직을 되풀이 한다. 그의 호 퇴계도 ‘토계에 물러앉는다.’는 뜻으로서 그는 벼슬을 79번이나 사양하면서 물러나 앉아 후학 양성에 열정을 쏟았다. 말년에 그는 그의 고향 안동의 토계에서 도산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한다.

다시 이야기를 퇴계와 고봉의 관계로 돌려보자. 1569년[선조 2년] 3월초에 퇴계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사직 허락을 받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선조는 마지못하여 퇴계의 낙향을 허락하면서   조정 신하 중에서 사람을 하나 추천하라고 한다. 퇴계는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일을 잘 한다고 하면서 추천을 안 하다가 선조가 세 번까지 묻자 기대승을 추천한다.

기대승 같은 사람은 글을 많이 읽었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가히 통유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렴 공부는 아직 부족한 듯합니다.

퇴계가 정유일, 김성일, 유성룡 등 당시에 내노라 하는 영남의 제자들을 젖혀두고 고봉을 선조에게 추천한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고봉은 퇴계에게 자기와 도반이 될 정도로 성리학에 가장 밝은 후학으로 비치었던 것이다.      
  
선조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은 퇴계는 1569년 3월4일에 서울을 떠난다. 그 날 고봉은 퇴계 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송하여 강가의 농막에서 유숙하였으며, 봉은사까지 따라가 송별한다.

고봉은 배 위에서 한 절구의 이별시를 퇴계에게 드린다.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 한강수야 / 漢江滔滔日夜流
떠나시는 우리 선생 네가 좀 말려다오 / 先生此去若爲留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 / 沙邊拽纜遲徊處
떠나심에 애 간장 가득 찬 이 시름을 어이하리. / 不盡離腸萬斛愁


퇴계 역시 시를 지어 고봉에게 화답한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 名流이니 / 列坐方舟盡勝流
돌아가고픈 마음 하루 종일토록 매어있네. / 歸心終日爲牽留
이 한강수 떠다가 벼룻물로 써서 / 願將漢水添行硯
끝없는 작별 시름 베껴 보려네. / 寫出臨分無限愁

두 시 모두 7언 절구로 운이 모두 유{留}와 수{愁}이다.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과 작별의 시름을 운으로 한 시이다. 이 시를 읽어 보면   고봉과 퇴계가 얼마나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570년 12월 8일에 퇴계는 안동에서 별세한다. 퇴계는 죽기 20일전인 11월17일 고봉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절을 하며 답하여 올리는 편지, 기승지에게.” 26살이나 연하의 후배에게 보내는 극존칭의 서두로 시작되는  퇴계의 마지막 편지를 한번 읽어 보자.

절을 하며 답하여 올리는 편지 , 기 승지 댁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멀리 사람을 보내어 부치신 진중하고 자세한 혜서{惠書}와 가르쳐 주신 별지를 받고서 근래 한가로이 수양{修養}하면서 도를 음미하시는 가운데 신명의 도움으로 행복하심을 구체적으로 알고는 염려되던 마음이 매우 위로되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내 몸도 금년에는 쇠약하고 피로함이 특히 심한데, 원근의 후생들은 남의 생각을 헤아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배우겠다고 번갈아 가며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사절해 돌려보내고 나면 다음 사람이 또 찾아옵니다. 그중에는 강력히 거절할 수 없는 자도 있어 분수에 따라 응대하다 보니 이로 인하여 더욱 피곤해집니다. (중략)

종래{從來}의 물격설{物格說}과 무극이태극설{無極而太極說}은 나의 견해가 잘못되었으므로 이미 설을 고쳐 정사{正寫}하여 영공에게 전하라고 이정에게 부쳤으나, 아마도 전해지지 않은 듯하므로 지금 한 통의 글을 올리는 바이니 밝게 양찰하기 바랍니다. 근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대략 적었습니다.

삼가 어려운 시절에 더욱 몸을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

경오년(1570) 11월 17일 황 돈.


이로써 고봉과 퇴계의 13년간의 편지 주고받음은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퇴계가 고봉에게 쓴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이 시대를 사는 깨어 있는 사람들, 소위 지성인들이 진실로 한번쯤 음미할 만한 구절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삼가 어려운 시절에 더욱 몸을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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