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물재공 유허비와 오남재 그리고 고봉 부모의 묘소에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6회 물재공 유허비와 오남재 그리고 고봉 부모의 묘소에서


물재공 유허비와 오남재에서

6월 중순에 다시 용동마을을 간다. 먼저 간 곳은 덕성군 물재공 유허비이다. 이곳을 여러 번 왔지만 이번에는 덕성군물재기공유허비{德成君勿齋奇公遺墟碑} 뒷면을 자세히 본다. 거기에는 기진{奇進}의 가계와 생애 그리고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의 생애와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의 조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물재공 기진의 증조부는 기건인데 이 분은 문종 때에 대사헌을 역임한 청백리였으나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출사를 권하였지만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은 절의파였다. 그의 부친 기찬도 홍문관 응교 벼슬을 하였다.


물재공 유허비를 보고나서 오남재로 향한다. 오남재는 넓은 주차 공간 옆에 있는 고가 기와집이다. 담장도 ㄷ자로 되어 있고 건물도 3채이다. 대문에는 ‘행주기씨 덕성군 문중’이라는 간판과 ‘임곡용동길 96 신룡동 428’이라고 주소가 붙어 있다.


종손 기성근씨와 문헌공 문중 기규철씨의 안내를 받아 오남재로 들어 갔다.  오남재는 가운데에 있는 네 칸 집 본채이다. 물재공 기진이 이 집을 짓고 ‘내가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 왔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집의 당호가 오남재이다.
  

오남재 마루위에서 한문 편액 하나를 보았다. 이것이 바로 고봉의 부친 물재공이 자식들에게 훈계한 글 <과정기훈 過庭記訓>이다. 그러면 <국역 고봉전서>에 실린 글을 읽어 보자.


과정기훈(過庭記訓)

내가 어릴 때부터 정훈[庭訓 아버지의 교훈]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이룬 것이 있음직한데도 기질이 낮고 용렬하여 어리석기가 처음과 같으니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다. 지나간 일은 지금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소씨{邵氏} 소백온{邵伯溫}에게도《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학자들은 모름지기 듣고 보는 대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하셨다. 이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조석으로 완미하려 한다.  아버지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o 학문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하고 또 반드시 외어야 하며 슬쩍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읽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짓곤 하되 모두 부지런히 해야 하며 또 그 중에 한 가지도 폐해서는 안 된다.

o 내가 너희들에게 학문을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 어찌 작록{爵祿}을 바라서 그러겠느냐. 바로 너희들로 하여금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다행히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고자 해서일 뿐이다.

o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람들과 행동을 너무 달리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름지기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요컨대 순수한 태고{太古}로 마음가짐을 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몸가짐을 하는 것이 매우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연못에 가서 고기 낚고 산에 가서 땔나무 하고 거친 밭 매 가꾸어 어버이를 섬기게 하려고 하는데, 남이야 뭐라고 하든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o 내가 어렸을 적에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께서 몹시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주셨다. 그래서 매양 어서 입신출세하여 이 망극한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 뜻을 이루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이것이 나의 영원한 슬픔이 되어버렸다. 너희들은 오늘날 잘 먹고 잘 입고 살면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 내가 자경[子敬{복재} 기준{奇遵}의 자]과 가장 우애로워 항상 한 이불을 같이 덮고 누워서 “우리 형제가 모름지기 한 구석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고 했었다.

o 항상 천문도{天文圖}를 모사{模寫}하고,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베껴서 기예{技藝}에도 두루 통하여, 거의 한 가지라도 얻은 것이 있기를 기하고자 했었다.

o “우리들이 뜻을 얻으면 의당 다른 궁핍한 이들을 구휼할 것이고 만일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남의 구휼을 받지는 않겠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 자경{子敬}은 죄를 얻어 유배되었고 나는 또한 떠돌아다니느라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다. 너희들은 이 뜻을 알아야 한다.

o 지금 세상에는 학문을 강구하지 않아, 한때는 서로 좋게 지냈다가도 뒤에는 도리어 곤욕을 보이곤 하니, 말을 하자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부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 요컨대, 친구는 없을 수는 없지만 또한 사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o 벼슬길의 풍파는 매우 두려운 것이다. 자기의 뜻을 행하기도 전에 재앙이 이미 따르게 되는 것이니, 다만 잘 헤아려서 가고 오고하는 것이 좋으나, 그것도 은거하는 것만은 못하다.

o 주자 朱子는 벼슬한 날짜가 겨우 40여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학자들은 또한 이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진실로 자기의 뜻을 행하려면 일개 현縣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국역 고봉 전서 1권>에서 인용

매우 가슴 뭉클한 가훈이다. 가훈은 가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중국의 <안씨가훈>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안씨가훈을 읽고서 이 가르침이 세상을 올바르게 그리고 모나지 않고 오래 사는 지혜라고 느끼었다. 물재공 기진의 가훈 또한 단순하게 고봉 선생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리라. 조용헌이 그의 책에서 언급하였듯이 기씨 가문의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이루는 기저가 되었으리라.
  

    
고봉 부모의 묘소를 찾아서

이제 고봉 부모 묘소를 찾는다. 고봉 부모 묘소는  오남재 뒷산에 있다. 오남재 뒷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소나무가 삼면에 심어져 있고 묘소가 여러 개 있다. 이 중에 문인석과 석주가 있고 옆에 단이 하나 있는 곳 바로 옆에 묘 두 봉이 나란히 있다. 바로 고봉의 아버지 물재공 기진과 어머니 진주강씨 묘이다. 묘 옆에 단이 하나 있는 데 이것이 물재공의 첫 번째 부인 방씨 단이다.


고봉은 1555년 정월 보름 그의 나이 29세에 부친상을 당한다. 그때 물재공 기진[1487-1555]의 나이는 68세이었다. 부인 강씨 [1501-1534]와 사별한지 21년 동안 홀로 지내면서 세상 풍파를 다 겪고 한 많은 세상과 이별을 한 것이다. 고봉이 쓴 묘기{墓記}에 보면 부친 물재공은 1487년 12월에 태어났고 6세에 그의 부친[고봉의 조부]을 잃었다 한다.

   한편 장성에서 살았던 큰 선비 하서 김인후[1510-1560]의 문집인  <하서전집 : 중 p361-362)>에는 그가 지은  ‘기상사 진 만사 2수’가 있다.  

  기준의 별세를 애도하는 5언 율시 만시 2수를 살펴보자

제1수

아우와 함께 학업을 쌓았었는데
풍파의 이별이라 한이 길구려.
궁한 운명이 장한 뜻을 저버렸으니
낮은 벼슬 어버이를 위한 것이라오.

경서와 역사책으로 천고를 꿰뚫어 보고
영고는 온갖 꽃을 어루만지네.
부질없이 계산{溪山}에 흥을 부치니
백년이 바쁘다는 것을 알 까닭이 있소.

제2수

늘그막에 촌구석에 은둔하였으나
한정부{閒情賦}를 읊은 적이 몇 해 이던고.
아들 가르친 시는 훈계에 족하고
몸가짐은 모두 다  본받을 만 해

구름을 바라보며 낮에 졸았고
눈 속에 산 헤매며 황정을 캤네.
남가의 꿈속{남가일몽}에 한 번 들어가니
천추에 다시 밝지 못하리로다.

이 시는 1수에는 기진의 아우 기준과의 이야기 2수에는 기진의 은둔적 삶과 아들 기대승 이야기가 나온다. 김인후와 기준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하서가 9살[1518년]때 중종 임금의 총애를 받은 교리 기준이 장성 맥동마을에 들러서 하서를 만났는데 그때 기준이 하서에게 임금님의 붓을 주었다 한다. 나중 일이지만 하서집안과 고봉 집안과는 사돈을 맺는다. 하서의 손자 김남중과 고봉의 딸 기씨가 혼인을 하였다.

하서는 기진의 은둔적 삶을 도연명의 삶에 비유하고 있다. 한정부{閒情賦}는 벼슬을 마다하고 귀거래한 진나라의 도연명[365-427]이 시골에서 지은 시이다.    

한편  <국역 고봉전서>에는 물재공 묘기와 부인 진주강씨에 관한 묘 이장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물재공이 별세하자 고봉은 먼저 돌아가신 모친 묘에 쌍분으로 합장하려고 하였단다. 그런데 땅을 파자 물이 나와서 자리를 옮기고 1555년 3월에 집 뒤에 묘를 썼다. 그리고 다음해인 1556년 3월에  모친 묘를 부친 묘 오른쪽에 이장하였다.  

고봉 부모의 묘는 왼쪽이 부친 물재공 묘이고 오른쪽이 모친 진주강씨묘인데 가운데에 비가 세워져 있다. 비는  한 줄에는 ‘증{贈} 순흥보작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덕성군 행장사랑 경기전 참봉 기진{奇進} 지묘’ 또 한 줄에는‘정경부인 진산강씨부우{祔右}’라고 적혀 있다.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이라. 경기전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 한 곳인데 관원으로 종 5품 영 1명과 종9품 참봉 1명을 두었다 한다. 그는 재상의 천거로 1527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실제 부임하지는 않았다. 죽은 후 의정부좌찬성 덕성군을 증{贈}받았다.


그 옆에 ‘증 정경부인 남양방씨 신위단’이라는 비가 하나 더 있다. 물재공의 전처인 방씨의 신위이다. 원래 방씨는 충청북도 청주시 수신리에 묘가 있어 고봉이 가끔 성묘를 하였는데 나중에 묘를 잃어 버려서 기씨 문중에서 1965년에 단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고봉 부모의 묘 윗 쪽에는 기진의 장손인 기효분 부부의 묘가 있다. 즉 큰 아들 대림의 아들이 여기에 묻혀 있다.  

고봉 부모의 묘에서 앞을 바라보니 고봉이 살았던 두동마을 집터가 바로 보인다. 죽어서도 아들의 집을 보면서 지내는 물재공 부부. 그들은 평소 살던 집 뒤 동산에서 저승에서도  고봉이 잘 지내기를 기원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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