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회 고봉의 신접살이 - 광산구 두정동 두동마을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고봉 기대승은 22세인 1548년에  19세의 함풍이씨(지금의 함평이씨)와 결혼을 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1530-1596)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2남 2녀 중 차녀이고, 참판 이종수[李從遂]의 증손이며 처가는 나주이다. 고봉은 둘째 아들이라서 따로 신접살이를 하여야 했다.

그곳이 바로 두말이라고도 하는 두동마을인데 이 마을은 용동 마을 바로 앞마을이다. 두동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왼쪽 길로 가면 당산나무가 있는 마을이 나오는데 정식 마을 이름이 광산구 두정동 두동마을이다.

이 마을 가기 전 왼편에 “금화지그”라는 공장이 있고 그 위에 나대지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봉선생이 살던 집터이다. 그 위에는 고봉의 후손 기씨 묘가 있다.

5월 하순에 찾은 고봉선생의 집터 자리는 풀만 무성하다. 집터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바로 앞이 용동마을이다. 오남재도 잘 보이고 그의 부모 묘소가 있는 용동마을 뒷산도 잘 보인다.  

고봉 선생 집터에서 왼쪽은 대숲 길이다.

이 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큼직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이 나무가 바로 몇 주일 전에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과 함께 와서 본 은행나무이다. 그 당시에는 다른 길로 와서 은행나무를 보았다.
즉 두동 마을버스 정류장 가기 전 왼편에 담이 처진 집이 한 채 있는데 이 담장을 따라서 곧장 올라가면 묘소가 보이고 그 묘소 위로 올라가서 바로 이 은행나무를 본 것이다.


이 은행나무는 고봉이 심었다 한다. 이곳에서 오른쪽을 보니 황룡강 지류가 보인다. 이 지류를 따라서 고봉의 아버지 기진이 배로 이삿짐을 날랐을 것이다.


450년 이상 된 은행나무 근처에 <백운정 白雲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일반적으로 은행나무는 집이나 정자 앞에 심는데 정자는 은행나무 뒤편에 세워졌을 것이다. ‘백운정’ 이름은 고봉의 ‘백운정에서 양사기를 전별하며’라는 시와,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고봉 선생 만장에 나온다. 죽재[竹齋] 양사기[楊士奇]{1531-1586}는 봉래 양사언의 동생인데 시를 잘 지었고 고봉과 친한 친구였다 한다.
고봉의 양사기 전별시에는 ‘산골의 외로운 정자, 석양이 머무는 누대’라는 표현이 있고, 시의 내용으로 보면 대나무와 국화가 많아 운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추측된다.

고봉의 집 정경은 그가 쓴 시 <유거잡영 15수>에 잘 나타나 있다  
유거잡영[幽居雜詠] 오언 사운 15수

   작은 집 깨끗하고 시원한데 / 小堂淸且爽
   꽃과 대나무 성긴 발에 비치네. / 花竹映疎簾
   흰 돌을 깔아서 길을 열었고 / 白石鋪開路
   푸른 솔가지 꺾어 처마를 때웠네. / 靑松折補簷
   가을 국화 흔들리매 자리가 향기롭고 / 榻香霜菊動
   술잔을 더하니 귀가 달아오르네. / 耳熱酒杯添
   취한 뒤에 시 읊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니 / 醉後詩情發
   미친 듯이 읊기에 붓끝이 닳네. / 狂吟筆退尖

    [중략]

   속태를 따르는 일이 없으니 / 事無趨俗態
   문을 닫아 땅과 발이 서로 닿았네. / 閉戶地接簾
   솔바람 소리 빈집을 채워주고 / 松韻盈虛室
   매화 가지는 짧은 처마를 지나네. / 梅梢過短簷
   바람은 구름길을 따라 사라지고 / 風從雲徑息
   달은 대나무 가지에 내려앉네. / 月向竹枝添
   가업을 지금 항상 생각하고 있으니 / 舊業今常念
   종남산이 꿈속에 뾰족하게 보이네. / 終南入夢尖

   한  쪽박의 물로 누항에 살거니 / 一瓢居陋巷
   진세가 드리운 발에 막혀 있네. / 塵世只隔簾
   정원엔 푸른 대에 맑은 바람 일고 / 綠竹淸風院
   처마엔 푸른 솔에 밝은 달이 비치네. / 蒼松明月簷
   한적한 곳이라 인적도 드물고 / 幽閒人更寂
   소쇄한 곳이라 취미가 생기네. / 瀟灑興頻添
   시 읊기 즐겨 그칠 줄 모르거니 / 喜詠不知止
   공연스레 붓만 닳아 뾰족해지네. / 空勞玉兔尖

    [중략]

   해를 가린 소나무는 장막 같고 / 遮日松如幄
   마루에 당한 대나무는 발과 같네 / 當軒竹似簾
   벽에는 서자의 걸상을 달았고 / 壁懸徐子榻
   꽃은 적선의 처마에 춤을 추네 / 花舞謫仙簷
   학을 길들이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 調鶴光陰換
   차를 달이며 시냇물을 더하네. / 烹茶澗水添
   사립문 온종일 닫고 앉아 / 紫門終日閉
   홀로 봉선화 꽃이 뾰족함을 감상하네. / 獨賞鳳觜尖


<유거잡영>은 고봉이 1570년 2월 그가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두동마을 옛집에 살면서 쓴 시이다. 옛집의 정경과 이 집에서 살아가는 맛과  자신의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사실 그가 낙향한 것은 원로대신들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고봉은 그의 말 대로 거친 성정에, 호오[好惡] 시비[是非]가 너무나 분명하여 주변에 그를 못 마땅하게 여기는 대신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유거잡영> 시는 얼핏 보면 고향집에 와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인들이 나를 안 알아주니 이제는 낙향하여 책 읽고 제자 키우며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 시들을 읽어 보면 고봉의 집 주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국화가 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에 나오는 세 갈래 길에 심은 나무와 꽃과 같다. 원래 삼경[三徑]은 한나라의 연주자사 장후가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면서 정원 안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가 심어진 세 갈래 길을 만들어 놓고 구중과 양중이라는 친구만 오게 하여 놀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고봉의 결혼생활로 화제를 돌려보자. 그는 나이 24세 되던 해(1550년) 8월에 이 집에서 첫 아들 효증을 낳는다. 고봉은 부인 이씨와 4남 3녀를 두었는데, 1남 2녀는 어려서 죽어 3남 1녀만 남았다.
[고봉이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1563년 섣달 초순에 둘째 아이가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봉은 편지에서 일곱 살인데 뭐든지 빨리 깨우쳐 사랑스러웠는데 갑자기 아이를 잃었다고 적고 있다.]

장남 효증[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벼슬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그 다음이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김인후의 손자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는데, 1598년 정유왜란 [丁酉倭亂]때 왜적을 만났으나 굴욕을 당하지 않고 죽었다.


고봉과 아내 이씨 부인과는 사랑이 각별하였던 것 같다. <국역 고봉전서>에는 그가 아내에게 바친 시 한수가 있다. “취중에 아내에게 주다 [醉中細君]” 가 바로 그것이다.  

    취중에 아내에게 주다{醉中細君]

백년도 이제는 꿈속만 같으니 / 百歲如今醉夢間
기쁘게 놀면 어느 곳이 편안치 않겠나. / 歡遊何處不淸安
밤이면 등잔불 그대와 함께하여 / 夜來燈火唯君共
속마음 나누면서 늙음을 보내오리. / 細討幽期卜晩閑


이 시는 그가 말년에 낙향하여 시골집에서 지은 시 같다. 취중진담이라고 한다. 고봉은 맨 정신으로는 낯간지러워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다. 술 취한 김에 술을 핑계 삼아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세군은 중국 한나라의 동방삭이 자기 아내를 부르는 애칭이다.

동방삭이란 인물은 고개를 삼천 번 이상 굴러서 오랫동안 장수한 바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이 시는 그동안 고생이 많은 아내와 함께 늘그막에 편안하게 오랫동안 잘 지내겠노라는 고봉의 속마음이 담긴 정이 넘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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