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회 고봉 기대승의 어릴 적 시절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고봉 선생의 생애{1527-1572} 46년을 개관하면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1527-1558까지 31년과 1558년-1572년 14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 1558년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고봉 선생이 태어난 1527년은 1392년에 건국된 조선왕조가 140여년이 되는 해로서,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은 이후  성종이 김종직등 사림을 등용하였고 연산군 때에 사림들이 무오 · 갑자사화를 겪는다. 그런데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훈구파들이 득세한다.


그런 가운데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광조등 신진 사림들을 등용하고 이에 고무된 조광조· 김정· 김식 · 기준등 청년 사림들이 위훈삭제등 개혁 정치를 꾀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1519년 11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고봉의 작은 아버지 기준은 기묘사화의 희생자이었고 그의 아버지 기진이 광주에 내려온 것도 기묘사화로 인한 것이었다.


고봉 기대승은 중종 시대에 태어나서 인종, 명종, 선조 임금 초기까지 살았는데, 명종 시절 까지만 하여도 훈구파가 정권을 잡아 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림파들은 뜻을 펴지 못하였고 선조 임금 대에 이르러서야 사림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전반기 생애 31년을 다시 두 시기로 나누면 1기는 1527년부터 1545년까지 18년이고 1545년은 을사사화가 일어난 해로 그는 이 해에 <자경설>을 지었다. 2기는 1546년부터 1558년에 과거에 합격하기 까지 13년간으로서 이 시기는 그가 결혼을 하고 부친을 여의고 성리학 공부에 매진한 기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봉선생의 어릴 적 시절 18년간을 알아보자. 그는 어린 시절을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에서 보냈다. 그런데 그의 어릴 적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생가 生家도 남아 있지 않는데 <물재공 유허비> 있는 곳이 그의 생가터라고 추측 할 뿐이다.


그의 어릴 적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1545년에 쓴 <자경설 自警說>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경설>과 관련된 <고봉선생 연보>를 살펴보자.


인종 원년 을사{1545} 선생 19세

7월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이 승하했을 때와 같이 곡림하고 소식{素食}하였다. 사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였다. 한편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그러면 그가 지은 <자경설>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11세까지의 일기를 살펴보자

태어난 지 1년 만에 조모를  여의었고   7~8세쯤   되어서는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를 의지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고생하시면서 길러주셨다. 나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죽으려다 살아났는데, 오늘에 이르러 아득히 그 일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중략}

계사년{7세}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고, 다음해인 갑오년{8세} 7월에 망극의 비통함을 당하여 이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다시는 학문을 일삼지 않았다. 대체로 아버지께서도 역시 큰일을 당한 터라 글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을미년{9세}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도 배우고 또 《소학 小學》을 외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년 10세) 겨울에 작은 누이가 역질{疫疾}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됨으로 인하여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도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꽤 진취의 희망이 있었다. 그해 겨울부터 정유년{11세}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는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 글을 보면 고봉의 11세까지의 어릴 적 생활은 다음 네 가지로 특징지어진다.

첫째 그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죽으려다 살아났다는 것이다. 즉 병약{病弱}한 것이다. 이 병약은 그에게 계속 따라 다닌 것 같다. 나중에 그가 관직을 사양하는 사직서에 보면 힘줄과 핏줄이 땅기어서 심하게 아픈 증상이 지속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둘째, 모친과 누이가 죽은 슬픔을 어린 시절에 맞이하게 된다. 그는 8살 때 모친인 진주 강씨{1501-1534}를 여의고, 10살 때 누이가 역질로 죽는다. 이런 슬픔은 그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원래 고봉의 형제간은 5남1녀 이었다. 그런데 3형제만 남고 나머지는 일찍 죽었다. 고봉은 둘째 아들이다. 위로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형 대림{1526-1565}이 있고, 아래로는 나이가 일곱 살 차이 나는 동생 대절{1534-1567}이 있다. 동생 대절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또 <자경설>에는 그는 외가 집에서 형과 같이 자랐으며 외종조모가 그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글이 있다. 어릴 때 모친을 여의었으니 외가에서 그를 측은하게 여기어 예쁘게 키웠으리라.

셋째, 그의 글공부는 상당히 늦게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요즘도  공부는 보통 네 살이 되면 배우는 데 일곱 살에 공부를 시작한 것은 상당히 늦은 감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 물재공이 공부를 안 시켰다고 한다. 물재{勿齋}란 호에는 ‘공부는 하지 말라.’라는 뜻이 숨어 있는데 세상이 싫어 고향을 버리고 이곳에 온 아버지 물재공 입장에서는 자식이 학문을 하여 또 다시 삼촌 기준처럼 화를 당할 수도 있음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리라.

넷째,  고봉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가르침을 받고 공부를 하였고 서당에는 안 다녔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산사에 가 있을 때 고봉도 따라가서 공부를 한 것이다.

한편 <고봉 연보>를 보면 고봉은 7세부터 공부에 열의를 보였고 작은 아버지 기준이 그의 모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사{1533} 선생 7세

비로소 학업을 시작하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고 암송하여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너무 열심히 하느라 힘들겠다고 위로라도 하면 “나는 이 공부가 좋아서 한다.”고 대답하였다.


정유{1537} 선생 11세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장구 大學章句》를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數學}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김공집{金公緝}이 연구{聯句}로 ‘식{食}’ 자를 시제[詩題}로 내어 선생의 글 짓는 것을 시험하자, 선생은 즉시 응하여 읊기를 “밥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 하였다. 이에 김공이 칭찬하기를 “너의 계부 季父인 덕양선생{德陽先生} <기준을 말함 -필자 주>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너 또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하구나.” 하였다.

이어서  12세부터 18세까지에 그는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용산 정희렴을 스승으로 삼고 글을 배웠으며 18세에 당시 광주목사 송순을 만난 기록도 보인다.

14세에 항상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을 애독하여 매일 《자치통감강목》한 권씩을 다 읽었고  15세에 서경부{西京賦}1백 30구{句}를 지었다. 그의 스승 용산{龍山} 정희렴 선생이 이 글을 보고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 의당 그 성문{聲聞}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전파하겠다. 생각이 멀고 기{氣}가 장대하며, 말이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설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다만 이것은 조그만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문득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중략}

16세에《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침식을 잊을 정도로 매우 열심히 연구하였다. 17세에는 전한서 前漢書》ㆍ《후한서 後漢書》 및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읽었다.  18세인 1544년에 중종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다. 또한 목사 송 순{宋純]이 유생{儒生}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 되었으면 곧 학업 성취도의 여하를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맹자와 한유의 글을 읽었다 {후략}

<자경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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