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회 고봉 기대승의 탄생(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3회 고봉 기대승의 탄생{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


월봉서원을 답사한 다음에 고봉 기대승이 태어난 곳을 찾아 나선다. 먼저 고봉 기대승의 탄생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월봉서원 묘정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선생의 휘는 대승 大升이고, 자는 명언 明彦이며, 호는 고봉 高峯이고 또 존재 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 奇氏로 행주 幸州 사람이다. 고 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 22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 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


고봉 기대승. 그가 탄생한 날은 1527년 11월18일이고 태어난 장소는 광주 고룡리 송현동 집이다. 그의 아버지는 물재 기진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원래 행주 기씨 가문은 본관이 행주인데 행주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이다. 그의 호 고봉 高峯도 고향의 산봉우리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고봉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한다. 그런데 기대승의 작은 아버지 기준이 1519년 기묘사화로 1521년에 죽자 이에 상심하여 그의 아버지 기진 奇進{1487-1555}이 서울에서 살다가 광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면 먼저 복재 服齋 기준 奇遵[1492-1521}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한 기묘명현으로서 1513년{중종 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사관 史官을 거쳐 홍문관 정자로 일한 뒤 사가독서를 하였고 수찬 修撰등을 역임했다.  또한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안인 균전법을 중종 임금에게 건의하여 훈구파로부터 질시를 받기도 하였다.

홍문관 응교{종4품}였던 그는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기묘사화가 일어난 날  홍문관에서 당직을 하던 중에  조광조 · 김식 · 김정, 김구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다음날 그는 조광조의 과격한 논의에 아부하였다는 이유로 국문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은 나이 28세입니다. 소년 시절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정성껏 하는 것이 마땅하고, 조정에 있으면 충성과 의리를 정성껏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뜻이 같은 사람과 옛 도를 강구하여 나라를 요순 堯舜 시대의 다스림과 같은 경지에 이르도록 기약하였습니다. 선한 자는 좋아하였고 선하지 못한 자는 미워하였습니다. 조광조는 어렸을 때부터 교유하였고, 김식ㆍ김구ㆍ김정은 근래에 상종하였는데,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지 모르고 교유하였을 뿐이며 아부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결국 조광조는  전라도 능성현{지금의 화순군}으로 김정은 금산으로 기준은 충청도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보다 앞서 기준의 맏형인 기형 奇逈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무장 茂長현감으로 있었다. {기준 집안은 5형제로서 기형은 첫째이고 기진은 넷째, 기준은 막내이다.} 기준은 울적한 마음에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고 회포를 풀고자 고을 사람과 함께 산에 올랐다.  첩첩한 산이 하늘을 버티어서 어머니 계신 곳이 더욱 아득하여 그는 그냥 도로 배소에 돌아왔다.


1519년 12월 16일 중종은 다시 어명을 내린다. 조광조에게는 사약이 내려지고 김정은 진도로, 기준은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그런데 온성에서 유배 중인 1520년 4월말에 그는 아산에서 배소를 이탈한 일이 발각되어  다시 의금부로 잡혀와 추국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아산 현감은 자기가 중한 죄를 받을까 두려워 그가 도망쳤다가 스스로 돌아왔다고 진술하였다. 이리하여 형장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그는 임금에게 죄가 없음을 상소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1520년 6월에 기준에게 곤장 100대에 유배지 온성에서 가시 울타리가 쳐지는 위리안치를 당하도록 하는 전교를 내린다. 이 후 그는 삭풍이 몰아치는 두만강 변 온성에서 행동이 제약된 채 귀양을 살다가 1521년 10월에 신사무옥 辛巳誣獄이 일어나자 사약을 받는다. {일설에는 목졸라 죽이는 교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확인은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기묘록>과 허균의 <학산초담>에는 기준의 죽음과 관련된 시 詩들이 적혀 있다. <기묘록>에는 그의 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하루는 궁궐에서 당직을 하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나그네가 되어 국경 바깥의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정처 없이 헤매었는데  고난이 너무 심하여 길가에서 시 한수를 읊조렸다고 한다.


낯 선 이 먼 땅의 강산도 고향 땅과 같은데
하늘 끝에서 눈물 흘리며 외로운 배에 의지했네.
검은 구름은 끝없는데 강의 관문 河關은 닫혔고
고목은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텅 비었네
들길은 가늘게 가을 풀 속에 갈라졌고
인가는 아스라이 석양  속에 담겨 있네.
만 리 길 가는 돛배는  돌아오지 않으니
푸른 바다 아득히 소식조차 끊기었구나.


뒤숭숭하여 꿈에서 깨어 보니 꿈에 읊조린 시가 너무나 생생하여 당직실 벽에 이 시를 적어 두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화를 당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를 가는 도중에 보는 풍경이 바로 꿈에서 읊었던 시의 내용과 너무나 똑 같았다. 유배 길에 그는 말을 멈추고 시를 읊으며 처절히 흐느끼니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기묘록>에는 “사람 일은  모두 먼저 정해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많은 선비들이 이 시를 서로 전하면서 애석해하였다”고 적고 있다.


다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학산초담>에 실려 있는 기준의 절명시 이다. 그는 30살의 젊은 나이에 함경도 온성에서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이 시를 읊었다 한다.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네.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日落天如黑     일락천여흑
山深谷似雲     산심곡사운
君臣千載意     군신천재의
惆悵一孤墳     추창일고분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나 다가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비참함이 가득 배인 시이다. 한편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질 정도로 비장함과 참담함이 느껴진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기진의 형제들은 상심한다. 둘째 형 기원 奇遠은 장성으로 이거하고 바로 윗 형 기진 奇進은 광주 소고룡리에 정착한다.

이 광주 소고룡리가 바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이다. 그러면 용동마을은 어디인가? 광주에서 임곡 가기 전에 ‘비시동 마을’이 있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신촌마을 2km라는 팻말도 보이고 오남재 吾南齋라는 표시석도 있다. 이 길을 따라 곧장 가면 오른편에 제각 같은 큰 기와집이 하나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용동 마을이다.

용동 마을 입구에 가면 ‘덕성군 물재 기공 유허비’가 있다. 이 유허비가 바로 고봉의 아버지 물재 기진의 가계와 생애가 적혀 있는 비이다. 고봉 선생의 종손인 기성근 씨는  물재공이 광주로 내려온 것은 이 근처에 그의 처가의 인척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야기 한다. 고봉의 외가는 전라도 영광이었다 한다.  고봉의 외고조부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진성군 강희맹{1424-1483}이고 외증조부가 강학손{1455-1523}인데, 외증조부가 유배를 당하여 영광으로 내려왔다 한다. 강학손의 큰 아들은 강영수인데 바로 고봉의 외조부이며, 강학손의 넷째아들은 강구수이며 그가 바로 광주에서 살았다 한다.

물재공 유허비에서 조금 가면 기와집 한 채가 나온다. 문에는 “행주 기씨 덕성군 문중”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다. 이곳이 바로 오남재 吾南齋이다. 오남재란 한자를 물재공 입장에서 풀이하면 재미있다. “내가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 오도다.”라는 뜻이다.

바로 이 마을에서 조선 성리학의 거유 巨儒 고봉 기대승이 태어났다. 마을이름이 용동 龍洞인 것처럼 그는 용의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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