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회 달뜨는 봉우리, 월봉서원에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2회 달뜨는 봉우리, 월봉서원에서


주말 오전에는 아내와 함께 월봉서원을 자주 간다. 서원을 구경하기도 하지만 서원 뒷산인 백우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고봉선생의 묘소를 지나 귀전암 까지 산책한다. 귀전암 가는 길은 정말 좋다. 소나무의 청아함과 시누대숲의 바람, 그리고 여러 가지 새들이 지저귀고 이름 모르는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다. 쑥, 고사리, 죽순도 있어 아내는 먹거리에 정신이 팔린다. 더욱 좋은 것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이 북적대는 무등산보다 훨씬 한가하고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다.


5월 중순의 주말 아침, 오늘도 여느 때처럼 월봉서원을 간다. 그런데 오늘은 좀 특별하다. 월봉서원을 제대로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진기와 수첩을 챙겼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에 있는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13번 도로를 따라서 임곡 중학교를 지나 광곡(너브실)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는 ‘빙월당 600m’란 표시판과 월봉서원 그리고 광곡마을이란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면 광곡경로당이 나오고 고봉학술원과 칠송정이 있다. 그리고 돌담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이 있다. 이곳이 바로 월봉서원이다


서원 입구에는 두개의 안내판이 있다. 하나는 월봉서원에 대한 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빙월당에 관한 안내판이다. 월봉서원 안내판에는 고봉 기대승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월봉서원의 건립 내역이 적혀 있다. 빙월당 안내판에는 정조임금이 빙심설월이라 하여 서원 강당이 빙월당이 되었다는 말이 적혀 있다


두 안내문을 읽고서 외삼문으로 들어간다. 외삼문 이름은 망천문 望川門이다. 망천이란 냇가를 바라본다는 뜻인데 무슨 연유로 이 문의 이름이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고봉 선생 사후 6년이 지난 1578년에 고마산 자락에 있는 서원 낙암 아래에 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 이름이 망천사 望川祠이었다. 그리고 망천은 ‘고마산에서 바라보면 황룡강이 보인다.’는 의미이다


망천문을 지나니 앞면에 강당이 하나 있고 좌우에 건물이 또 하나씩 있으며 그 가운데에 비가 두개 있다. 앞면의 강당이 바로 빙월당이고, 좌우 한 개씩의 건물은 동재와 서재이다. 서원은 옛날의 사립학교인 만큼 기숙사가 있었다


동재에는 명성재 明誠齋, 서재에는 존성재 存省齋라고 편액이 붙어 있다. 이 편액은 모두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쓴 것이란다. 명성재 明誠齋라. 이 이름의 연원을 생각해 보니 명明은 {대학}의 첫 머리에 나오는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힌다.’(大學之道 在明明德)는 글귀에서 나온 것이고, 성 誠은 {중용}에 나오는 대표적 덕목으로서 ‘최선을 다한다. 정성, 성의를 다한다.’는 뜻에서 따 온 것 같다.그러면 명성 明誠은 바로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성의를 다하라는 의미이리라. 즉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라는 화두 같다


서재의 존성재 存省齋는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성찰이 있다”는 의미인데, 성省자가 논어의 오일삼성 吾日三省에서 따온 글자인지 또 존 存자가 존양 存養에서 연원한 것인지 글쎄 잘 모르겠다. (한편 존재 存齋는 고봉 선생의 또 다른 호이다


한편 서원 한 가운데 두개의 비가 있다. 이 비들은 월봉서원 묘정비와 묘정비 병서이다. 하나는 한문만으로 된 비이고 다른 하나는 한글 번역 비이다. 나는 한글 번역비 앞에서 번역 글을 읽는다. 그런데 한글 번역이라는 데 한문이 너무 많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글 반 한문 반이어서 제대로 읽기가 어렵다. 어려운 글자도 많아서 읽기를 포기할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중간 부분은 대충 보면서 인내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보니, 마지막이 “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 上澣에 성균관장 成均館長 후학 後學 경주 慶州 최근덕 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제 서원도 변신하여야 한다. 안내문은 한글세대를 위하여 우리말로 알기 쉽게 적어 놓아야 한다. 외국인을 위하여 영어로 만들어진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으면 좋겠다. 광주의 문화 유적들도 2015년 유니버시아드 세계대회를 유치한 것에 걸맞게 세계화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강의실인 빙월당 강당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붙어 있다. 가운데에 월봉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그 우측에는 빙월당, 마루 안쪽 좌측에는 충신당이라고 붙어있다.


빙월당이라는 이름은 정조 임금이 고봉선생의 고결한 학덕을 빙심설월 氷心雪月에 비유하여 하사한 이름이고, 월봉서원은 1654년에 효종임금이 사액한 서원이름이다. 그런데 충신당 忠信堂은 그 내역을 잘 모르겠다. 논어의{학이} 편에 증자가 한 말인 “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점에 대하여 반성을 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충)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신)를 지키지 못한 일은 없는가?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습) 못한 것은 없는가?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에 나오는 충 忠과 신 信을 합한 당호인 것 같기도 한데 자세히는 잘 모르겠다


한편 월봉서원 간판 글씨는 이산뢰(1603- ?)가 썼다고 하며 충신당글씨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썼다. 송준길은 우암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영수인데 화순에 있는 조광조의 적려유허비문 글씨도 그가 썼고, 장성의 필암서원에도 그의 글씨가 있다. 그런데 빙월당 글씨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가 없다


특이한 것은 서원 강당에 현판이 이렇게 세 개나 붙어 있는 점이다.
현판을 여러 개 붙인 것은 순천 옥천서원의 예에 따라 그리 하였다고 하나 아무튼 매우 드문 일이다. (나중에 고봉선생의 종손 기성근씨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월봉서원은 서원 이름이고 충신당은 강당이름이며, 빙월당은 건물 이름이어서 3개의 현판이 같이 붙어 있는 것이란다.)


강당을 구경하고 나서 왼편에 있는 목판 보관소인 장판각을 지나서 내삼문으로 향한다. 여러 계단을 올라가서 보니 문의 이름이 정안문 靜安門이다. 정안 靜安이라, 조용하고 평안한 문이라는 의미인데 고봉 선생을 배향 하면서 조용히 평안하게 하라는 뜻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한참 보니 정 靜자와 안 安자 글자를 {대학}에서 본 것 같다. {대학}에서 “지극히 좋은 상태에 머무는 것을 안 다음에 의지가 정해지고, 의지가 정해지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평안할 수 있고, 평안하면 바르게 생각할 수 있고, 바르게 생각한 다음에 지극히 좋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지지이후유정 정이후유정 정이후능안 안이후능노 노이후능득 )”라는 글을 읽은 것 같다. 이 {대학}의 글은 학문을 하는 태도를 말하는데 고봉 선생의 성리학 공부 방법이 바로 이 {대학}의 글이 아니었을까?

우연히도 {국역 고봉 전서}에서 정 靜에 관한 고봉의 시 하나를 찾았다.

정(靜) 자를 읊은 시를 정자중(鄭子中)에게 주다

내가 대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관찰해보니 / 吾觀元化妙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기틀로 발현하네. / 動靜互機發
고요함 아니면 움직임이 어찌 있으며 / 非靜安有動
움직임 아니면 고요함은 멍에가 없다 / 不動靜無
움직임은 고요함으로 뿌리를 삼으니 / 動以靜爲根
고요함은 바로 움직임의 휴식이네 / 靜乃動而歇
유행은 참으로 헤아리지 못하니 / 流行儘不測
지극한 고요함은 혹시라도 어지러울 수 없네 / 至靜無或滑
오직 사람만이 그 받은 것을 체험해서 / 惟人體其受
고요하고 움직임에 늘 하늘을 대하네 / 靜動恒對越
고요함에 근본해서 사람의 표준을 세우니 / 本靜立人極
성인은 인욕의 해침이 없느니라. / 聖無人欲伐
움직임이 겹치면 본연을 잃게 되니 / 累動喪本眞
뭇사람들은 부질없이 골몰한다 / 衆人徒自汨
이 때문에 군자의 배움은 / 所以君子學
고요함을 주로 하여 공경하고 소홀함이 없네 / 主靜敬毋忽
마음을 더듬어 기운을 기르고 / 探心以養氣
창졸간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네 / 戒懼平倉卒
마침내 습관이 천성을 이루면 / 終然習與成
많은 잘못을 보완할 수 있도다 / 亦可補剩
선현들이 후학을 사랑하며 / 前賢惠後學
역력히 이러한 의미 보여주었네. / 歷歷茲義揭
그대는 본래의 고요함 지켜서 / 君其守本靜
묵묵히 알고 힘을 다하도록 하오 / 默會力須竭

이 시에 나오는 정자중은 정유일(1533-1578)의 자로서 호는 문봉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는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고봉과 퇴계의 편지에도 자주 나오는 인물이다.


이윽고 사당으로 들어갔다. 사당 이름은 숭덕사 崇德祠이다. 글씨는 강암 송성용이 썼다는데 낙관 落款은 없다. 그런데 사당이름을 왜 숭덕사라고 하였을까? 고마산 낙암 밑에 처음 만들어진 사당은 망천사라고 하였는데 이곳으로 이전하여서는 덕을 숭상하는 의미의 숭덕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외삼문 이름이 망천문이니 또 망천사라고 붙이기는 곤란하였겠지만 숭덕사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사당에는 고봉 선생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예전에는 박상과 박순, 김장생과 김집도 함께 배향하였다 하나 그들의 신위는 지금은 없다. 문 틈으로 고봉 선생의 신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밖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서 숭덕사를 나왔다.


이제 월봉서원 답사를 마무리 한다. 서원을 나오기 전에 묘정비 번역비에서 고봉선생에 대한 찬사를 읽는다

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
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
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
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
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
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
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
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
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
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
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
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
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
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
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
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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