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회 월봉서원이 처음 세워진 곳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월동 망월봉 아래]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월봉서원은 세 번 세워졌다. 처음에는 신촌 마을 낙암산 아래 낙암이고, 두 번째는 광산구 산월동 망월봉 아래에 세워졌다가 대원군 때 훼철되었고, 세 번째는 지금의 너브실 마을에 중건되었다.

신촌마을 낙암산 아래에 지어진 낙암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어 서원은 낙암에서 20여리 동남쪽으로 떨어진 망월봉 자락으로 옮기었다. 동천{桐川} 냇가를 바라보고 망월봉 아래에 세워진 월봉서원{月峯書院}은 효종 5년[1654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초 예조에서는 동천{桐川}, 도산{道山}, 월봉{月峯} 3개의 명칭을 검토하여 도산으로 정하였으나 최종 낙점 과정에서 월봉으로 결정이 되었다 한다.  


1655년[효종 6년] 4월에 서원은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하늘의 뛰어난 기운을 얻어 / 得天間氣
세상의 명유가 되었네. / 爲世名儒
정제한 금 윤택한 옥과 같으며 / 精金潤玉
물속의 달 얼음 호로와 같았네. / 水月氷壺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 訓襲家庭
정주학을 연구하였네 / 學則程朱
기운은 한 세상을 덮고 / 氣蓋一世
이치는 만 가지 현상계를 꿰뚫었네 / 理透萬殊
이미 널리 배우고 예(禮)로 요약해서 / 旣博而約
체와 용이 구비되었네 / 體用之俱
탁월하게 높은 식견은 / 卓見高識
호로에 의지하지 않았네 / 不依葫蘆
일찍이 스스로 조예가 뛰어나 / 早自超詣
여러 어리석은 사람들을 계도하였네. / 爰啓羣愚


《논사록》이 남아 있으니 / 論思有錄
마땅히 이것을 좌우에 두고 보리 / 宜置座隅
울창한 저 아름다운 산소에는 / 薈彼佳兆
산골짜기 좌우로 감돌고 있으며 / 山谷盤紆
고반하던 유허에는 / 考槃之墟
아직도 남은 향기 변치 않고 있네 / 遺芳不渝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영령을 모시니 / 建宇妥靈
많은 선비들의 소원이었네 / 多士之諏


한편 월봉서원의 초대 원장은 신독재 김집[1574-1656]이다. 김집은 고봉의 친구이자 서원의 재산을 마련해 준 전라감사 김계휘의 손자이고 사계 김장생[1548-1631]의 아들이다.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 이외에 현종 12년[1671]에 눌재{訥齋} 박상과 사암{思菴} 박순이 추향 {追享}되었고, 숙종 9년[1683]에는 사계{沙溪} 김장생이 추향되고 신독재{愼獨齋} 김집이 종향{從享}되었다. 또한  정조 12년[1788] 4월에 예조 좌랑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그런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이 훼철{毁撤}되고 만다. 이후 1938년에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에 빙월당을 이건하고 1979년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1982년에 숭덕사와 내삼문을 세웠고, 1983년에 장판각을 지었으며, 1990년에 명성재와 존성재 및 외삼문을 세웠다. 그리하여 1991년에 서원을 복원하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산월동에 있는 망월봉 아래에 지어진 월봉서원을 찾으러 간다. 5월초에 기씨 문중 사람들과 같이 처음 간 이후 이번이 두 번째 길이다. 우선에 찾아가는 곳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에 있는 월봉경로당이다. 첨단에서 남부대학교 앞 교차로에서 왼편으로 가서 봉산로 길을 따라 다시 왼편으로 가니 월봉로가 나온다. 이 길을 곧장 가니 월봉경로당이 있다. 월봉경로당 바로 앞집은 ‘월봉길 236 산월동 222-1번지’이다. 이 집의 안 골목이 바로 월봉서원으로 가는 길이다.


지난번에 동행한 문헌공 문중의 기규철씨는 ‘월봉길 234’라는 표시가 된 집 자리에 바로 홍살문이 있었다고 말하여 주었다. 홍살문은 보통 빨간 색으로 칠하여진 문인데 이 문은 지금부터는 엄숙, 경건하게 보행하라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외삼문은 유영루{遊泳樓}라고 이름 붙인 누각이었다 한다. 이 유영루 편액은 지금 월봉서원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다. 서원 앞에 누각을 세운 사례는 장성의 필암서원에도 볼 수 있다. 필암서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확연루가 바로 그것이다.


홍살문이 있었다는 골목길은 막다른 길이다. 산으로 가는 길은 막히었고 창고 같은 가건물 하나만 있다. 더 이상 갈 수 없어서 이곳 산봉우리 아래가 바로 월봉서원 터임을 확인만 하였다. 사진을 몇 장 찍고서 다시 월봉경로당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월봉서원 내역을 아는 사람이 있을 까 싶어서 경로당으로 들어갔다. 마침 나이 드신 남자 분 한분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앞산을 가리키면서 이 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삼각산이라고 대답한다. 산봉우리가 세 개이니 삼각산 이겠구나 생각하였다. 그 분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월봉서원이 처음 세워진 터에 대하여 아는지를. 경로당 총무라고 하는 황병연씨는 왜 갑자기 월봉서원 이야기를 들먹이는지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자세하게 월봉마을의 역사를 말하여 준다. 이 마을은 예전에는 서원촌이라고 불리었단다. 망월봉 아래에 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 훼철되었고, 그 분이 어릴 때에는 서원 터에 여러 그루의 배롱나무와 기왓장과 주춧돌들이 있었다 한다.


한편 지금의 경로당 자리 바로 근처에 냇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냇가가 홍수가 잦아서 주변 집들이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냇가가 지금은 논밭이 되었단다. 그리고 보니 그 분이 말한 냇가 이름이 바로 동천{桐川}같다.


월봉경로당 앞쪽에는 멀리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고 그 앞으로 차가 다닌다. 그래서 그 분에게 저곳도 하천이냐고 물었더니 영산강 지류라고 설명하여 준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월봉서원과 관련하여 신문사에서도 취재를 나왔었다고 말하면서 몇 년 전에 기씨 문중에서 월봉서원 터를 탐사하여 주춧돌을 13개인가 14개인가를 찾아내었고 그 중 3개를 월봉초등학교 교장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인다.    


월봉서원이 세워진 망월봉을 정면에서 확인도 하고 영산강 지류도 볼 겸하여 차를 방죽 길로 몰았다. 방죽 길은 첨단에서 산동교 가는 뚝방 길인데 차가 꽤나 많이 다닌다. 차에서 보니 왼편에 삼각산 전경이 다 보이고 월봉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봉우리 3개중에 하나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어 산이 움푹 들어가 있다. 방죽 길에서 보니 망월봉도 제대로 보이고 월봉 경로당도 잘 보인다. 영산강 지류라는 뚝방 하천도 꽤나 넓다.


이 길을 따라 보훈병원 후문으로 가서 월봉초등학교를 들렀다. 월봉초등학교에 있다는 주춧돌 3개를 확인하기 위하여서이다. 월봉중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주차를 하고 주춧돌을 찾았다. 주춧돌은 월봉초등학교 입구의 교훈 비 옆에 묻혀있었다. 월봉초등학교 교훈 비 한 곳에는 “교훈, 사랑 슬기 건강”이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는 “배움의 새 둥지를 틀면서 진솔한 학문 탐구 자세와 충절의 선비 정신을 이어 받고자 월봉서원의 옛 주춧돌에 교훈석을 세운다. 2005.5.6” 라고 적혀 있다.
사무실로 오는 길에  고봉 선생이 유일하게 남긴 시조가 생각났다.


호화코 부귀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 까 마는
백년이 못하여서 무덤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엇 하리오.


호화와 부귀로는 밭을 가는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다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의 신릉군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역시 백년이 못 되어서 무덤에 묻힌 신세이고 그의 무덤 위에서 밭을 가니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은 말하여 무엇 하리오.

그러므로 호화와 부귀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학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고봉 선생은 돌아가신지 440여년이 되었어도 그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그는 당대에 호화와 부귀로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값진 삶을 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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