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회 조선 임금들의 제왕학 교과서<논사록>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고봉이 별세한 한 달 뒤인 1572년 12월, 선조 임금은 어명으로 경연 가운데서 고봉의 말을 뽑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것으로서 하루에 오전, 오후, 저녁 세 번 이루어졌고 때로는 밤에도 강론이 있었다. 경연은 덕에 의한 교화를 이상으로 하는 정치원리를 근거로 왕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때로는 이곳에서 정치현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선조의 어명이 있자, 예문관 검열 하곡 허봉[1551-1588]은 경연일기를 검토하여 문장을 다시 교열하고 차례를 만들어 편찬을 하였다. 이 책이 바로 논사록{論思錄}이다. 편찬자인 허봉은 초당 허엽의 아들이고 허균의 형이다.  


논사록{論思錄}은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명종 19년 [1564]에서 선조 2년[1569] 4월까지 경연 내용 중 19개 항목을,
하권은 선조 2년[1569] 5월에서 선조 5년[1572] 5월 까지 경연 중 9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논사록의 내용은 [논어],[대학],[예기],[소학],[근사록] 등 경전을 가지고 강론한 내용을 중점을 두면서도 당시 조정에서의 정치현안과 경세제민에 관한 사항의 논의가 이루어진 것을 다루었다.  특히 논사록은 고봉의 경세사상 즉 치국과 제민에 대한 철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강의록으로서 [사단칠정논변]이 유학의 이론서라면 [논사록]은 유학의 실용서이다.


그러면 [논사록]에 나타난 고봉의 정치철학을 알아보자. 먼저 고봉은 나라를 다스리려면 시비가 분명하고 언로가 열려 있으며 의로움이 중요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천하의 일에는 옳고 그름 즉 시비[是非]가 없을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복종하여 정사가 순조로워집니다.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실로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이니, 일시적으로는 비록 이것을 엄폐하고 사람들을 처형하여 입을 막는다 할지라도, 그 시비의 본심[本心]은 끝내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정사를 베풀 때에 어진 이를 초청함은 심히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진 이를 등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옳고 그름을 밝혀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뒤에야 어진 자를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위 말은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 23일 조강{朝講}에서 고봉 기대승이 16세의 선조 임금에게 [대학]을 강의하면서 한 말이다. 이 날 강의는 선조가 임금이 되어 처음 열린 경연자리였다. 그 첫 경연의 강사가 바로 고봉이었다. 당시에는 퇴계 이황 선생도 안동에서 아직 서울로 올라오지 않아 고봉이 첫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이 강의에서 고봉은 성리학의 정통이 정몽주,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짐을 밝히고 조광조와 이언적의 명예회복을 주청하였다. 그러면서 시비가 분명하여야 나라의 기강이 확립됨을 강의한 것이다. 요즘 이야기로 하면 역사 바로 보기를 하여 시비를 가려야 반듯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고봉이 명종임금에게 역설한 언로에 관한  강의이다.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서 이루어지니 ,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덕이 성취된 뒤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 임용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다만 형식이 있고 그 실제가 없습니다. 이제 성덕{聖德}이 숙성하시어 의리의 학문에 대하여 밝게 깨달아 의심이 없으십니다. 다시 유념하시어 부지런히 경연에 나아가신다면 성덕이 더 더욱 빛날 것입니다.


언로{言路}는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략] 지난번 하늘의 변고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였을 때 5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제 또 상께서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힐문하고 있습니다. 신은 이 뒤로부터 더욱 진언하는 자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중략} 행여 사리에 맞지 않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여기고 용납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위 강의는  명종 19년, 1564년 2월 13일 주강{晝講}에서 아뢴 말로서 [논사록]의 맨 처음에 나온다. 경연의 중요성과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고봉은 국정 철학은 이익보다는 의로움이 중요시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국가는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이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참다운 이{利}는 의{義}에서 나오는 것이니 자기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한 것입니다.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 이른 바 의로서 이로움을 삼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욕{利慾}의 마음은 남과 나를 구별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자기에게 이롭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을 해치게 마련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에게 이롭게 하고자 하여 나와 다투고 빼앗으려 한다면 이익을 추구해도 얻지는 못한 채 해만 따르게 되니 이것이 이익을 이익으로 삼는다  하는 것입니다.  


한편 고봉은 제왕의 임무에 대하여는 수신{修身}과 인재등용을 역설한다.

제왕의 자리는 매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깊은 못에 임한 살얼음을 밟는 듯 조심해야 하고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경솔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반드시 간사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을 밝게 구별 한 뒤에야 인재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침에 마땅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제왕들이 지극한 정치를 이룩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수신을 근본으로 삼았고 또 인재를 불러 모으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습니다. 국가의 온갖 일을 군주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으니 현자와 함께 하여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자 할 때에도 먼저 재목을 준비한 뒤에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뜻을 세우고[立志] 어진 이를 구하고[求賢] 책임을 맡기는 것 [責任], 이 세 가지 일을 항상 유념하소서. 다만 어진 이를 구하려는 마음만 있고 이러한 뜻이 서지 못한다면 비록 어진 이를 구할 지라도 얻지 못 할 것이요, 설령 이전 선비를 얻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뜻이 굳게 서지 못하면 또한 활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임무를 맡겨주고 성공하기를 꾀할 것이며 하찮은 과오는 접어두고 따지지 마소서. 이것이 치도의 큰 강령입니다. 큰 강령이 서지 못하면 하찮은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여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경세제민{經世濟民},즉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고봉 기대승은 민본{民本}과 재물{財物}을 중요시 한다.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백성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서 백성들이 편안하고자 하면 편안히 해 주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것을 싫어하면 수고로움을 면해주니 이것이 이른바 그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이 용서{恕}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항상 백성들을 생각해서 날씨가 추워지면 혹시 헐벗는 자가 있는 지 염려하며 흉년이 들면 굶주린 자가 있는 지 염려하여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이 한다면 선한 정사를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리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니 하루도 재물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재물을 위주로 하면 이욕이 생겨서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백성이 편안한 뒤에야 국가가 다스려지는 것이니 백성들이 풍족하다면 군주가 어찌 홀로 풍족하지 못하겠습니까?


[논사록]은 선조 임금 이후 역대 조선 임금들의 제왕학 교과서가 되었다. 논사록이 처음 나온 후 200년 지나서 논사록이 다시 중간된다. 정조 임금은 논사록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그러면 정조임금의 전교와 치제문을 살펴보자. 먼저 전교이다.

고봉 선생의 논사록{論思錄}을 중간{重刊}한 뒤 정조임금의 전교[1788년]

이제 [논사록]을 보니, 이것은 바로 고{故} 승지 기대승이 경연에서 아뢴 말이다. 서문과 발문을 보면 근래에 비로소 중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좋은 말을 아뢰고 착한 선비들을 보호한 그 공로에 대해 책을 어루만지며 세 번 반복해 보니 어찌 존경스럽고 탄상하는 심정을 금할 수 있겠는가. 살아서는 성군을 만나 자신의 소회를 다 말하였고, 죽어서는 군주가 사관에게 명하여 그가 아뢴 말을 모아 기록 하도록 까지 하였으니, 아, 거룩하다. 지금 나는 이 책을 즐겨 보느라 밤이 이미 깊어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켰는지도 몰랐으니, 열 번의 야대{夜對}보다도 훨씬 낫다.
[후략]

다음은 정조임금의 치제문을 보자.
  
명종과 선조의 태평성세에 / 明宣盛際
여러 현인들이 울흥하였네. / 衆賢蔚興
[중략]

이와 기의 원류와 / 源流理氣
전례의 상과 변에 대하여 / 常變典禮
명쾌하게 분석하니 / 劈析明快
선배들도 존경하였네. / 先輩所畏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니 / 正色立朝
군왕의 외척들이 숨을 죽였네. / 戚畹屛息
태평성세를 만나 / 際遇明明
행하고 그침을 여유 있게 하였네. / 行止綽綽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 卷以南歸
명망과 절개가 더욱 드높았네. / 名節逾卓

내가 그의 유서를 읽으니 / 予讀遺書
그 이름이 [논사록]이었네 / 其名論思
사관이 모아서 기록한 것을 / 起注所裒
성조께서 명명하셨네. / 聖祖命之
훌륭한 그 말씀이여 / 旨哉攸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 燭跋頻剪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 / 擊節三四
시대는 다르나 감동되니 / 曠世相感
내 그리움은 더욱 두텁네. / 予懷冞摯
이는 실로 정신으로 사귀는 것이니 / 實維神交
어찌 옛날과 지금의 간격이 있을쏜가. / 豈間今古
[후략]


이 치제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명문{名文}이고 감동적이다. 특히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는 개혁군주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 꾼 정조 임금이 [논사록]에 얼마나 심취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이 글을 쓰면서 이 시대의 정치가들, 지도자들, 지식인들을 생각하여 본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을 위하여 한 목숨 다 바치겠다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고봉 선생의 말씀처럼 의{義}일까. 아니면 의{義}를 가장한 이{利}일까.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이기를 자처하는 이들이여. [논사록]을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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