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회 고봉 기대승의 장례식, 그리고 묘소에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12회  고봉 기대승의 장례식, 그리고 묘소에서

고봉 기대승의 장례식

고봉 기대승은 광산구 두동마을 본가에 시신이 안치되어 100일 상을 치른다. 그때의 예법은 그랬다. 보통 선비도 1개월 초상을 치렀다. 조문은 1573년 2월초까지 이어졌다. 서울 남산에 있는 고봉 집에서도 조문객을 받았다.

[고봉전서]에는 심의겸, 양응정, 김계휘, 김계, 유홍, 최경회, 정철등 20명의 제문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봉의 제자 송강 정철(1536-1593)의 제문을 보자.  

제이십{第二十}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

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망천{望川} 사우{社宇}에 유풍만 방불합니다.

1573년 2월 8일  고봉 기대승의 장례식이 있었다. 이 날 상여를 끌고 가는 만장이 55개나 되었다. 만장이란 죽은 이의 공덕을 애도하여 지은 시, 죽은 이에 대한 산 자의 슬픔을 담은 마지막 이별 시인데, 시를 비단에 써서 영구를 앞에서 끌고 인도한다고 하여 만장{輓章}이라 하였다.

만시는 김계휘, 이이, 노수신, 허엽, 심의겸, 양사기, 우성전, 윤근수, 김성일, 정유길, 정유일, 박순, 정철, 유근, 최경회 등 당대의 정치인, 고봉의 친구, 그리고 제자들이  썼다.

그 중에서 노수신[1515-1590]과 이이[1536-1584]의 만시를 감상하여 보자.

먼저 노수신의 만시이다.

무등산 앞에서 만났던 사람
우리 어진 명언 이었네.
섣달그믐 매역에서 회포를 풀며
목우 타던 그때를 회상했었지

공부에 시달려 분잡하였고
술 취한 다음에야 한가로웠네.
비루한 세상 얘기 새삼스럽고
확고한 경전 탐구 기쁘다마다

나그네 꿈에 외로운 봉우리 보이더니
귀향길에 병마가 몸을 감쌌네.
황천이라 이렇게 이별을 하니
쇠약 병약한 속에 그리움 못 잊을레라.


노수신은 1547년 정미사화로 진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는 진도에서 유배 중일 때 사람들에게 글 공부를 가르쳐 교화시켰다. 이 일화는 두고두고 진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선조가 즉위하자 유배 간 미암 유희춘과 소재 노수신등은 등용되었는데 이들이 특별 승진토록 건의한 이가 바로 고봉 기대승 이었다.  

다음은  율곡 이이의 만시를 보자

남쪽 봉황 하늘 높이 오색 날개 펼치니
맑은 세상 모범 되어 형가에 뜻 두었네.
가슴 속의 탁월한 재능 한번 시험 못하고
죽은 뒤에 더 해지는 두터운 성은 들리네.

거침없는 그 문장 서책 속에 빛이 나고
높고 높은 그 기개 구름 속에 맺혔어라
화산의 한번 이별 이승 저승 갈렸으니
초사로써 흐느끼며 초혼할 길 전혀 없네.  


이 날 고봉 기대승이 묻힐 장지는 청량산 중턱에 있는 묘 자리이다. 일찍이 고봉은 용동마을에서 신촌마을로 가는 저수지 ‘두정재’ 바로 위에 있는 산 ‘평가산’에 자신의 묘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형 승지공 대림이 1565년에 별세하자 그에게 묘 자리를 양보하였다 한다. 기대림의 묘소는 배산임수의 자리이다. 배산임수는 묘자리의 기본인데 산은 인물을,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한다.  
    
1572년 2월 고봉 기대승은 가묘{家廟}에 시사{時祀}를 지내고 저녁 무렵에 귀전암{歸全庵}에 가서 구경하였는데, 이때 아들 효증{孝曾}과 제자 유은{柳溵}ㆍ김경생{金景生}ㆍ이운홍{李運鴻}ㆍ곽호{郭顥}가 따라갔다.

선생은 청량산 중턱을 둘러보더니 아들 효증을 불러 한 곳을 지적하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나를 이곳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고봉이 이 자리에 묘 자리를 잡자 주변 사람이 이 자리가 절손{絶孫}의 자리라고 우려하였다 한다. 그랬더니 고봉은 기씨이면 되지 절손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한다.

실제로 고봉은 증손자대에 이르러 절손이 된다. 고봉의 손자가 아들 없이 딸 하나만 두어 고봉의 형 대림의 증손자중 한 사람을 양자로 들인다. 양자인 기원{奇遠}의 묘는 고봉의 형 대림의 묘 아래에 있다.  

고봉 선생이 이곳에 묘 자리를 잡으면서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것일까. 아무튼 알 수 없으나 절손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귀전암을 다녀오는 길에 묘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귀전암은 고봉이 어릴 적에 공부하던 곳이다. 그가 쓴 [자경설]에는 부친이 산사로 피해 가 있을 때 그가 같이 따라가서 공부하였다는 구절이 나오는 데 이곳이 바로 청량산 아래의 암자이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됨으로 인하여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도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꽤 진취의 희망이 있었다. 그해 겨울부터 정유년[11세] 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는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곳에는 불가의 암자도 한 두 개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량산은 지금의 백우산 옛 이름이다. 조용헌 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청량산은 지혜의 부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불교적 맥락의 이름이고 백우산 {白牛山}은 하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는 풍수적인 이름이다. 산 이름도 고려에서 조선을 거치면서 불교에서 풍수로의 변천이 드러난다.  우연일지 모르나 퇴계 이황이 수양하였다는 경북 봉화군의 산 이름도 청량산이다.    

귀전암은 백우산 자락 중턱에 있다. 월봉서원에서 출발하여 고봉 묘소를 지나 오른쪽 길로 15분 정도 올라가면 귀전암 터가 보인다. 이곳은 꽤 넓은 평지인데 유허비가 하나 있다. 이 비에는 귀전암 유허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귀전은 선조이신 문헌공 고봉선생이 강업 하신 곳이다.
증자가 말씀하신 “부모께서 온전히 낳으시고 자식이 온전히 돌아가야 한다.” 는 말씀 한마디에 천년 후에 심법{心法}을 확실히 보겠다.  이 암자에 선생이 말씀하신 바는 증자의 도{道}요 온전한 바는 증자의 전 全이니 증자도 또한 암자가 있었던가. [중략] 무릇 후손된 사람들이 각자 그 온전함을 온전히 하고 그 터를 버리지 않으면  귀전암을 중건할 날이 없어도 걱정 할 것이 없다. 언젠가는 그럴 사람이 나올 것이다. 언젠가는 그럴 사람이 나올 것이다. 유허가 백우산 중록에 있어 바라보니 승경이요 수석은 광{光}이 난다. 승경과 광은 백세의 유풍이다.

1997년 5월  세움


귀전{歸全}이라는 말은 공자의 제자 중 한사람인 증자[증삼이라고도 한다]의 말로서 그는 [대학]과 [효경]을 지었다. 논어에도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효도라는 그의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증자는 오일삼성[吾日三省]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있는데 고봉은 증자의 말을 상당히 좋아한 듯하다.


고봉 묘소에서

다시 월봉서원 뒷산에 있는 고봉 선생의 묘소를 찾아간다. 요즘은 고봉 묘소 방문이 나의 손님 접대 방식이 되었다. 귀한 사람을 만날 때, 서울에서 손님이 왔을 때 그들과 같이 월봉서원과 묘소를 구경하고 근처 식당에서 메기탕을 먹는다. 황룡강에서 잡은 메기로 끓인 메기탕은 맛이 정말 토속적이다.  

고봉의 묘소는 문인석과 두 개의 묘 그리고 비석이 있다. 왼쪽이 고봉의 묘이고 오른쪽이 고봉의 부인 이씨 묘이다. 부인 함풍이씨는 그가 죽은 후 25년 후인 1597년에 별세한다. 부인은 홀로된 지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분명하게 옳은 방도로 가르쳤다 한다.  

묘 앞의 상석은 책갈피 같은 결이  있고 시커멓다. 이 상석을 보니 고봉이 너무나 책을 사랑하여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비석은 너무 오래되어서 글씨가 잘 안 보인다. 이 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진  묘비가  묘  오른편에 조금 떨어져서 세워져 있다.
  
묘소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자라고 있고 이름모를 들풀 들이 피어 있다. 묘소 위를  올라가서 앞을 바라보니 정말 경치가 좋다.  앞에 구룡산이 보이고  황룡강이 흐르며 먼 곳이 장성 상무대 자리이다. 상무대 자리중 군데군데 패여 있는 부분이 골프장 같다.  

이 자리에 있으면 기를 받는 느낌이다. 금년에도 열 번 이상 고봉 묘소를 왔는데 이곳에 올 때 마다 이 자리에 서면 마음이 상쾌하고 편안하다. 참 좋다는 생각이 저절로 난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아무튼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묘소 위의 대숲 길에서 바라보는  묘소와 앞산 그리고 하늘은 정말 좋다. 한 폭의 그림이다. 시인이라면 시가 나올 것이요, 화가라면 그림을 그릴 것이다. 국악인이라면 남도창이 나올 법하다.

고봉의 묘소 옆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비명에는 그의 가계와 업적 그리고 자손의 내역이 적혀 있다. 고봉 선생은 1590년에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그가 이전에 종계변무주{宗系辨誣奏}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증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문헌{文憲}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도덕이 있고 옛 글이 널리 통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기록할 만한 선행이 있는 것을 ‘헌{憲}’이라 한다.

고봉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효증{孝曾}, 차남은 효민{孝閔} 3남은 효맹{孝孟}이며,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아들 한 명과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큰 아들 효증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매당 김점{金坫}의 딸인 부령 김씨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효민과 효맹은 정유왜란{丁酉倭亂}때에 중로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고봉의 딸과 효민 효맹의 부인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고봉의 장녀 기씨 부인은 김인후의 손자 남중의 부인인데 왜병의 겁탈에 굴하지 않고 죽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고 팔뚝 하나만 남아있어 이를 묻었다 한다.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하서 김인후 묘 아래에는 그녀의 팔뚝 무덤이 있고 맥동마을 입구에는 열녀비가 세워져 있다.

일설에는 광곡마을 앞에 세워진 칠송정{七松亭}은 고봉의 장남 효증이 고봉의 위하여 시묘살이 하던 곳인데  일곱 소나무가 있는 정자 칠송정{七松亭}이라는 이름은 고봉과 큰 아들 효증 그리고 정유재란 때 죽은 효민과 효맹 부부와 고봉의 딸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한다.
  

기효증 부부 묘소에서
  
고봉 묘소를 보고나서 다시 월봉서원으로 내려오면서 고봉의 장남 기효증 부부 묘를 찾았다. 묘는 월봉서원 바로 뒤에 있다. 비석에 ‘군기시 첨정’이라는 벼슬이 적혀 있고 부인은 부령김씨[요즘의 부안김씨]이다.  그는  고봉의 문집을 모두 정리하여 고봉집을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그의 사위인 조찬한도 [고봉집] 편찬에 일조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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