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회 고봉의 별세- 정읍 매당을 찾아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7.5 일요일에 고봉 기대승이 별세하신 장소를 찾아 나섰다. 일행은 고봉 선생의 종손인 기성근씨, 문헌공파 총무이신 기규철씨,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강사인 임준성씨  그리고 나 , 모두 5명이다.

먼저 가는 곳은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 있는 태인 객관이다. 태인 동헌 근처에 객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선에 태인 동헌을 찾아 나선다. 태인 IC에서 태인면의 번화가 지역 한 약국에서 태인동헌의 위치를 물었다. 태인 초등학교 근처에 있다 한다.

태인 초등학교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학교 교정으로 들어가서 주차를 하고 유치원 바로 옆을 보니 기와집이 한 채 있다. 이곳이 동헌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태인 동헌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서 중종 때 시 · 서 · 화 삼절로 유명하고 신숙주의 증손자인 영천자 신잠(1491-1554)이 태인 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동헌으로 들어갔다. 동헌은 동쪽에 대청마루가 있고 서쪽에 방이 두 칸 있는데 대청 앞에 청녕헌{淸寧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고을을 깨끗하고 평안하게 다스리라’는 의미의 현판. 청렴과 안녕이 목민관의 덕목임을 더욱 느낀다.

동헌 이곳저곳을 자세하게 둘러보면서 방 안도 자세히 보았다. 이 방에서 고봉 선생이 머물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행은 잠시 예를 갖추고 묵념을 하였다. 그리고 이제야 후손들과 후학들이 찾아옴을 선생에게 고하였다.  


1570년 2월에 광주로 낙향한 고봉 기대승은 1572년 2월27일에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종계변무주청사는 명나라가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고려의 문신 이인임의 아들이고 고려왕을 네 명이나 죽였다고 알고 있어 이를 고치고자 명나라에 가서 주청을 드리는 일이었는데 워낙 일이 막중하여 고봉이 안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 도성에 도착한 고봉은 곧바로 병이 난다. 그래서 사신으로 가지는 못하고 변무주{辨誣奏}를 지어 올렸다. 요즘 같으면 외교문서를 지은 것이다. 이후 그는 병으로 5월에는 대사간 자리에서 7월에는 공조 참의ㆍ지제교 자리에서 , 9월에는 다시 대사간 직을 그만둔다.

1572년 10월 3일, 고봉은 아예 귀향을 한다. 몸이 아파서 도저히 정사를 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나는 날 친한  선비들이 나와 한강에서 고봉을 전별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고봉에게 “사대부로서 조정에서 처신할 때 시종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선생은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고봉의 이 답변을 들은 이들은 모두 탄복하였다.


고봉은 10월 10일에 천안{天安}에 도착한다. 그런데 갑자기 볼기에 종기가 났다. 10월 15일에 태인{泰仁}에 도착하였는데, 병이 더욱 악화되어 이곳에서 머물며 치료하였다.

10월 25일, 태인 공해[公廨- 관청의 숙소 객관과 같은 의미임]에 큰 며느리의 아버지인 매당{梅塘} 김점{金坫}이 고부에서 달려와 문병을 하자, 고봉은 김점에게 “사람의 수명은 천명{天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개의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어렸을 때에는 시문{詩文}에 힘쓰다가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터득한 것이 있었으나 단지 독실하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날마다 엄숙히 반성하며 조심했습니다. 강석{講席}에서 옛 성현의 면모를 접하여 강론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저도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학문이 옛 선현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몹시 송구합니다. 내가 몇 년이라도 더 살아서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며 학자들과 함께 끝까지 강론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하나의 크나큰 다행일 텐데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집안일에 대해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척박한 밭 몇 마지기가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그대의 집에 내 며느리가 있으니, 그대의 집은 우리 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그대의 집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고봉 선생은 시중드는 사람에게 빨리 매당으로 가자고 재촉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선생의 병세가 더욱 심해질까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공해{公廨}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갓을 가져와 씌우라고 명하였다. 시중드는 사람이 하려고 하지 않자, 선생은 강요하면서 의관을 차리고는 가마에 올라탔다.


[고봉연보]와 [행장] [시장]들에 나타난 위 기록들을 보면 고봉은 태인 객관에 11일 정도 머물다가 10월26일에 사돈집인 고부군 매당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보니 동헌에 있는 방은 조정 관료들이 숙식을 하는 객관이 아니다. 다시 태인 객관을 찾으려 하였으나 동헌을 본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 일행은 고봉 선생이 돌아가신 장소인 매당을 찾아 나섰다. (다음 날 정읍시청 문화재 전문위원 서인석씨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태인 동헌은 현감이 집무를 보는 외동헌 이란다. 원래 태인 초등학교 자리가 조선시대 태인현 관아였는데 일제 시대에 현감의 관사인 내동헌과 조정 관리들의 공무 수행 시 머무는 객관을  헐어 버리고 그곳에 초등학교를 지었다 한다.)

매당{梅塘}은 사돈인 김점{金坫}의 호임과 동시에 그의 집이기도 하다. 김점은 부안 출신인데 참판 김석옥(1477-1535)의 셋째 아들이다. 김석옥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김점이 셋째이고 고봉의 친구인 운강 김계(1528-1574)가 넷째이다. 김계는 순천부사 시절에 고봉에게 김굉필을 모신 <경현당(지금의 옥천서원)기{記}>를 부탁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점은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인물들과 친교가 많았고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여러 번 낙방하였다. 그래서 과거를 그만두고 학문과 예의에 힘써서 영은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재 이항[1499-1576]의 문인으로 고부군 우일{雨日}(지금의 정읍시 정우면)에 살다가 만년에 정읍시 덕천면 망제리 망제부락에 척심정{滌心亭}을 짓고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한다. 그의 신위는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있는 남고서원에 이항, 김천일등과 함께 모시어져 있다.

김점과 고봉 기대승과는 사돈 간이다. 고봉의 큰 며느리가 김점의 딸이다. 그리고 김점의 아들 효사는 고봉의 제자이기도 하고, 김점의 아들 김취남이 고봉의 동생 기대절의 큰 딸과 결혼을 하였다 (기대절은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말하자면 기씨 집안과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매당을 찾기 위하여 우리 일행은 먼저 척심정부터 찾아 나섰다.  예전에 척심정을 가본 고{故} 정병련 교수의 책 [고봉 선생의 생애와 학문]에는 척심정은 전북 정읍시 망제동 망제부락에 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정읍시 농소동 망제부락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있어서 우리는 농소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마을 위치를 물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농소동 주민자치센터는 일요일이라서 문이 닫혀 있었다. 별수 없이  네비게이션으로  망제부락이라는 이름을 쳐서 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정읍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서 고부 방향으로 6km 정도 가니 왼편에 마을이 하나 나온다.

이 마을 입구 모정에는 주민들이 여러 사람 쉬고 있다. 한 주민에게 이 마을에 척심정 유허비가 있는 지를 물었더니 바로 오른 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다고 가르쳐 준다. 마을 이름을 물었더니 내오마을 이라고 한다.

내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일반적으로 버드나무는 강가에 심어져 있는 것이라서 이곳이 하천이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가 본 평양의 대동강 가에도 강 양쪽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평양의 별칭이 류경{柳京}이다.]
  
마을 주민의 말 대로 콘크리트 포장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30여 미터를 가니 석벽위에 비가 하나 보인다. 비석을 확인하니 척심정 유허비가 맞다. 비석 앞면에 ‘매당 김선생 척심정 유허비’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에는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고 매실이 익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하천 복개 공사한 곳에 자연석 돌이 하나 있다. 이 돌을 자세히 보니 척심이라는 글자가 한문으로 적혀 있고 매당 김선생 글자도 보인다. 이 비가 바로 원래 만들어진 유허비 같은데 안타깝게도 땅에 반 이상 묻혀 있다. 역사적 유물이 이처럼 방치되고 있다니.

척심정은 어디에 있을까? 척심정은 매당 김점이 망제산 아래 기슭의 냇가에 지은 정자라 하니 지금 유허비 근처가 냇가이고 이 산이 망제산이며 척심정은 이 산 중턱 어디인가에 지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점의 집 매당은 어디에 있는가? 기록에 의하면 김점은 고부군 우일[{雨日}지금의  정읍시 정우면]에 살다가 만년에 정읍시 덕천면 망제리 망제부락에 척심정{滌心亭}을 짓고 살았단다. 또한 고봉 연보에는 ‘10월 26일 저녁에 고봉은 매당{梅塘}에 도착하였다. 매당은 정읍시 덕천면 오공리 근처인데 매당은 김점의 집이다.’ 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고봉이 별세하신 1572년에 김점은 척심정이 지어진 근처 어디에 살았고 매당은 바로 이 내오마을 (옹골부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어디이다.

한편 매당이 만년에 척심정을 지었다는데 그 만년이 1572년 이전인지 아니면 이후인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매당 김점은 생몰연도를 알 수가 없다. 태어나기는 김계가 태어난 1528년보다 먼저일 것인데 별세한 연도는 알 수 없어 만년을 어림잡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매당은 내오마을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고부군 우일면 어디에 있을 수도 있다. 지도를 보니 정읍시 태인면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장 인접한 곳이 정읍시 우일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가면 농소동 내오마을이다.  


이제 이쯤에서 정리를 하자. 고봉 기대승이 별세하신 장소인 김점의 집 매당은 찾지 못하였다.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도 않고 집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태인에서 광주로 내려오는 지점인 정읍시 정우면이나 척심정 유허비가 있는 정읍시 농소동 내오마을 근처 어디에 매당이 있었을 것이다.


척심정 유허비 답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광주로 내려온다. 승용차 안에서  <고봉 연보>에 나오는 고봉의 별세 기록의 나머지 부분을 읽는다.  


10월 26일 저녁에 고봉은 매당{梅塘}에 도착하였다. 매당은 정읍시 덕천면 오공리 근처인데 매당은 김점의 집이다. 주위 사람들이 문후{問候}하자, 선생은 “이곳에 도착하니 기운이 소생하는 것 같다.” 하였다.

이날 선조 임금은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御醫} 오변{吳忭}을 보내어 급히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는 한편,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였다. 어의 오변이 오는 도중 선생이 별세하여 생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 어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그대가 태인현{泰仁縣}에 도착하여 볼기에 종기가 나고 또 상기증{上氣症}을 앓고 있다 하니, 내 마음이 무척 아프다. 이에 의관 오변에게 약을 가지고 가게 하니, 그대는 약을 복용하고 몸을 잘 조리하라.”

10월 30일 저녁에 선생은 아들 효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의 성품은 경박하니, 만약 신중한 뜻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 하시고, 말을 마치자 운명하였다. 이 날은 바로 11월 초하루였다. 밤은 이미 4경이었는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선생은 정해년에 태어나셨으니 향년은 46세였다. 태인에서 부터 선생께 문병하려고 온 원근의 문인들과 유생들은 이때에 이르러 호상{護喪}하고 돌아갔다.

한편 부음이 알려지자, 상(선조임금)은 크게 슬퍼하며 수의{襚衣}를 하사하였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애통해 하였으며 남산에 있는 선생의 우사{寓舍}에 가서 신위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식견이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이황{李滉}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설을 강구하여 옛 성현들이 미처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연에 입시할 때에는 말한 것이 요순과 삼왕{三王}의 도{道}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에서 유종{儒宗}으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나서 귀향하는 도중에 죽었습니다. 가세{家勢}가 청한{淸寒}하여 장사 지낼 비용이 없으니, 관(官)에서 상례와 장례를 주선하여 국가가 유자{儒者}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답사를 마친 며칠 뒤, 조선왕조실록에 기대승의 졸기가 적혀 있는 지가 궁금하였다. 1572년 11월 8일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찾았다.


호군  기대승{奇大升}이 졸{卒}하였다.

이 사람은 뜻이 높고 일에 과감하였으며 선악{善惡}의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였고 널리 배우되 옛 것을 좋아했으며, 문장도 뛰어나서 가히 보배로운 그릇이요 세상에 드문 인재라 할 만하였다. 다만 너무 강직하고 자신의 그릇이 너무 커서, 말을 쉽게 하여 기로{耆老}들을 악평하여 구신{舊臣}과 대신들에게 큰 미움을 사서 훌륭한 기개를 펴지도 못하였는데 갑자기 죽을병이 든 것이다.


매우 단촐한 졸기이다.  지기{志氣}가 높고 일에 강개{慷慨}하며 선악이 분명하고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나다고 적은 것은 그를 칭송하는 글이다. 그런데 다만 이후의 기록은 그의 단점이다. 너무 강직하고 말을 쉽게 하여 구신들과 불화하고 미움을 샀다는 대목은 그가 1570년 2월에 낙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졸기의 단서 구절을 읽으면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의 성격을 말한 구절이 생각난다.  


[전략] 대체로 저는 바탕은 비록 허약하지만, 기세는 강하고 거칩니다. 실행은 미록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이름은 먼저 퍼졌습니다. [중략] 게다가 품성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며 가벼이 입바른 소리를 해대니, 혜숙야 [중국 진나라 사람. 죽림칠현중 한사람으로 도량이 넓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함 -필자 주]같은 사람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후략]

1560.8.8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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