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회 낙암에서 - 망천사 터를 찾다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낙암은 신촌마을에 있는 신룡동 5층 석탑 뒷산에 있다. 예전에는 고마산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낙암산이다. 고마산을 낙암산으로 이름 바꾼 것이 고봉 선생이 낙암을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룡동 5층 석탑 가는 도중에 축사가 있다. 소를 여러 마리 기르고 있어서 그곳에서 차를 세웠다. 먼저 신룡동 5층 석탑을 본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부처가 정말 특이하다. 돌부처 모습이 영험이 있게 보인다.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낙암을 가는 길은 왼쪽 오솔길로 가야 한다. 길이 잘 만들어져 있는 쪽으로 가면 안 된다. 왼쪽 오솔길은  도중에 나무들이 땅바닥에 있어 길을 가로막고 있다. 한낮인데도 산길을 걷기가  호젓하다. 햇볕도 잘 안 들어온다.

처음 올라가는 숲길에는 소나무가 듬성듬성 있고 조금 더 가니 한 쪽은 협곡인데 나무가 울창하여 협곡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좁은 길을 따라 계속하여 10분 이상을 올라가니 시누내와 청죽이 울창한 곳이 나온다.

조금 더 가니 왼편에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낙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터에 들어서니 입구에는 집의 주춧돌로 보이는 돌이 여러 개 있다. 중간 지점에는 석유정이라고 써진 우물이 있고 맨 끝에는 낙암구지라고 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종손 기성근씨는 이곳이 바로 망천사 터라고 이야기 한다. 낙암은 이 터의 바로 위에 있다 한다. 그런데 숲이 무성하고 여기에서 위로는  올라 갈 수가 없다. 고봉이 지었다는 낙암은 서실{書室}인데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시무를 논의하기고 하고 귀한 손님이 오면 묵기도 하였다 한다.


고봉은  1570년 5월에 낙암을 짓고 나서 회포 시를 쓴다.
이 시를 감사하여 보자.


낙암에서 회포를 쓰다〔寓樂菴書懷〕


사문이 돌아가심을 통곡하며 / 痛哭斯文喪
쓸쓸한 낙암에서 홀로 지내네 / 寒菴獨倚形
눈 내린 창가에 마음 잊지 못하고 / 雪牕心耿耿
바람 부는 골짝에 눈물 줄줄 흐르네. / 風壑淚泠泠


유서를 다시 찾을 길이 없으니 / 無復尋遺緖
부질없이 옛 경서만 안고 있노라 / 空餘抱古經
훗날 지하에 놀게 되면 / 他年遊地下
혹시라도 영령을 뵐 수 있으려나 / 儻得見英靈

이 시는 눈 내리는 겨울에 낙암에서 홀로 지내면서 퇴계 이황 선생이 돌아가심을 통곡하는 시이다. 퇴계 선생이 없는 세상. 서재 이름도 선생이 지어 주시고 액자 글씨도 써 주었는데 그분은 이제 안 계신다.

이 시에는 너무나 허전하고 의지할 길 없는 고봉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의 말미에 ‘훗날 지하에서도 퇴계를 뵙고 싶다’고 한 구절은 혹시 고봉이 자기의 죽음을 미리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종손 기성근씨는 망천사 아래에는 동료{東寮}가 있었다고 설명하여 준다. 동료{東寮}는 제자들이 기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숙사인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단다. 십 수 년 전에 큰 홍수가 와서 산이 휩쓸린 바람에 흔적이 없어진 탓이다.

한편 망천사 터 맨 끝에는 낙암구지 비가 있다.
비에 적힌 글을 읽어 본다.

낙암은 조선 중기 문헌공 고봉 기대승께서 성리학을 강론하신 유허이다. 선생이 44세 되던 선조 3년 5월에 낙암을 지으시고 그 아래 동편에 수간{數間}의 우사{寓舍}를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케 하고 이를 동료라 하였다  
(중략)

선조5년 11월 초1일 선생이 46세로 졸하시니 호남 유생들이 낙암하에 망천사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으나 이 사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서원을 망월봉하 동천{望月峯下 桐川} 위로 옮겨 신독재 김집 선생이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효종 4년에 월봉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중략)  

찬연히 빛나던 낙암이 425년의 세월 속에 모두 유실되고 지금은 초석과 석축 편린과 그 터가 무성한 청오죽{靑烏竹}에 묻혀 흔적으로 남았으니 이제 후학과 후손들은 유적비를 세운다.    
숲속 오두막에 조용히 살아도 밝고 빛나니
처음 서재를 지어 푸른 언덕에 잠겼어라
대숲 밤 비 소리 울리고
잿마루 외로운 소나무 노을에 떠 있네.


서책에 눈을 대고 있어도 원래부터 싫지 않고
거친 조밥으로  배를 채워도 역겹지 않네.
또 성현들이 전수한 뜻 알았으니
어찌 옳고 그름과 빗나감을 논하리오.

1998년  문헌종 종중

이 비의 마지막에 적힌 시는 고봉 선생이 1570년 5월 낙암을 지었을 때의 회포를 적은 시 같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숲 속에 지어진  조그만 오두막 집 낙암. 이곳에서  조촐하게 살아도  성현의 뜻을 알 것 같으니 어찌 옳고 그름과 인생이 빗나감을 따져 본 들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이제는 책을 보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현의 뜻을 더 깨달으리라. 맨 뒷부분은 1570년 2월 광주로 낙향한 일에 대한 고봉의 심사가 나타나 있다.    


망천사 터 중간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석유정{碩孺井} 우물이 있다. 우물 이름이  ‘명석한 유학자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명석한 유학자는 바로 고봉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음일까. 우물에는 개구리가 여러 마리 살고 있다. 물도 마실 수가 없을 정도로 고여 있다.

우물 주변에는 검은 대나무 소위 오죽{烏竹}이 무성하게 여러 그루 자라고 있다. 검은 대나무를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오죽을 보니 율곡 이이(1536-1584)의 오죽헌 생각이 난다. 강릉의 오죽헌은 이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그를 낳았다. 율곡과 신사임당 두 모자{母子}는 우리나라 화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5천원 권에는 율곡 이이의 초상화가 ,  5만원 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퇴계의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룬 율곡 이이는 고봉의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사람이다. 그는 고봉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제자를 많이 두었고 기호학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면 그 동안 학계는 고봉 기대승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황의동 교수에 의하면 고봉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동안에 종손 기성근 씨는 망천사의 집 구조를 알아보기 위하여 줄자로 주춧돌의 간격을 잰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집이라고 나에게 말하여 준다.

망천사{望川祠}는 고봉 사후 6년 후인 1578년에 지어졌는데 그 이름은 냇가를 바라보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보면 황룡강 물줄기가 보인다 하여 지은 이름인데 지금은 망천사 터 앞에 푸른 대나무들이 너무 우거져서 황룡강 지류 냇가를 전혀 볼 수가 없다. 세상이 변하였으니 옛 흔적을 찾는 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석축을 확인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왕에 이곳까지 왔으니 낙암에 관한 고봉의 시 한 수를 더 살펴보자.

통판 성주와 함께 낙암에서 자고 유생의 운을 써서 이별의 회포를 펴다
〔同通判城主宿樂菴 用柳生韻敍別懷〕

작은 띳집 경치 빼어난 곳에 열렸으니 / 小菴開勝地
깃들어 살면서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 棲息更何求
즐거움은 유서를 찾음에 있으니 / 樂在尋遺緖
벗님 오면 이 놀이 함께 하리라 / 朋來共此遊
가을바람 끝없이 불어오고 / 秋風吹不盡
초승달 그림자 처음 흐르네. / 新月影纔流
이별과 만남은 인간의 일이라 / 離合人間事
떠나고 머무름을 망연히 맡기노라 / 茫然任去留

이틀을 함께하매 작별이 어렵나니 / 兩日追隨作別難
내일 아침 전송 길 멀고멀겠지. / 明朝相送路漫漫
육 년 동안 나의 선영 보살펴 주었고 / 六年覆我墳塋惠
한 번 작별에 그대의 기개 흠모하노라 / 一別欽君志氣完
산악은 막혔어도 정신은 가고 싶고 / 山嶽隔來神欲往
냇길 바라보면 코끝이 시큰하리라 / 川塗望處鼻應酸
유명한 동산에 맑은 경치 많다 하니 / 名園聞說多淸勝
게으른 객은 어느 때나 마음껏 관람하나 / 倦客何時得縱觀

하늘가 맑은 가을에 젓대 소리 퍼지니 / 天畔淸秋一篴橫
이별하는 마음 술 만나 슬피 울고 싶구나. / 離腸遇酒欲悲鳴
멀리 알겠노니 한양 북쪽 서로 생각하는 땅에 / 遙知漢北相思地
기러기가 응당 소식을 보내리라 / 鴻鴈應須爲寄聲

통판 성주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낙암에서 고봉과 함께 잠을 잘 정도로 친한 손님이다. 고봉은 그와 작은 띳집에서 술 한 잔 하고 잠을 같이 잤다. 그런데 다음 날은 이별이다. 그 이별이 너무나 아쉽다.  잘 가게나 친구여,  다시 소식 전하겠네.

망천사 터를 내려오면서 낙암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한 겨울에 풀들이 마르면 다시 낙암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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