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406_500년 전 스승에게 길을 묻다

  • 작성자 :월봉서원 작성일 :2016.07.04

 

 

500년 전 스승에게 길을 묻다

2016.04.06./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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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광산의 월봉서원. 가운데 중심이 되는 건물이 빙월당이고,

 그 뒤로 고봉 기대승을 모신 사당이 있다. 서원을 찾은 이들이

옥색 한복을 입고 빙월당 주변을 거닐며 선비체험을 하고 있다.

월봉서원 선비체험의 매력은 딱딱한 줄로만 알았던 조선시대 유교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 흥미롭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광주 월봉서원 & 장성 필암서원  


광주 광산의 월봉서원은 한마디로 놀랍습니다. 오래전에 케케묵은 역사책의 갈피 속으로 들어간 줄로만 알았던 서원이 여태 살아 숨쉬고 있으니 말입니다. 서원을 찾은 여행자들은 옛 유생들이 입던 옷을 갖춰 입고서 서원 뒤편의 ‘철학자의 길’을 걷다가 길을 잡는 이의 구성진 소리 한 자락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기라성 같은 문사들이 자연을 벗 삼아 누렸던 이른바 ‘계산풍류’의 전통은 서원이 프랑스의 살롱문화와 결합한 ‘살롱 드 월봉’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차 한잔의 다담(茶談)과 누정에서의 달맞이도 근사했습니다. ‘철학자의 부엌’ ‘꼬마 철학자 상상학교’처럼 이름만으로도 매력적인 체험이 한가득입니다. 성리학의 학문적 전통이 칠판과 책상을 버리고 창의적 상상력으로 옷을 갈아입으면 얼마나 흥미로운 콘텐츠가 되는지를 월봉서원은 보여줍니다. 지루하고 케케묵은 것인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실상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딴 위치와 불편한 대중교통에도 불구하고 월봉서원은 늘 여행자들로 붐빕니다. 

지금으로 치면 ‘사립학교’쯤 되겠지요. 조선시대 ‘서원’이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는지요. 고리타분한 역사유적이나 지루한 문화재가 먼저 떠오르지는 않으신지요. 쇠락한 한옥 건물이나 굳게 닫아건 문부터 떠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이나 영주의 소수서원처럼 빼어난 산수 속에 들어선 풍류 넘치는 공간을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네요.

여기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서원 두 곳으로 안내합니다. 광주와 전남 장성.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의 물길을 끼고 지척의 거리에 두 개의 서원이 있습니다. 월봉서원과 필암서원. 서원이 지금 학교와 좀 다른 점은 세상을 뜬 학식 높은 스승을 기리고 모신다는 것입니다. 월봉서원에는 고봉 기대승이, 필암서원에는 하서 김인후가 그렇게 후학들이 모신 스승입니다. 이 두 곳 서원으로의 여정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고봉과 하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돈지간이었던 두 인물의 삶을 좇아 서원을 둘러보면서 거기 묵직하게 얹혀 있는 정신 대신, 서원의 빼어난 경관에만 눈길을 두었던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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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성 필암서원의 강당 격인 청절당 마루에서 내다본 모습.

정면이 하서 김인후를 모신 사당의 문이고, 왼쪽 기둥 뒤 작은 건물이 인종이 보내준

대나무 그림 판각을 소장하던 경장각이다.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의 솜씨다.  

 

 

 

#광주 월봉서원… 계급장을 뗀 선비를 만나다  


월봉서원은 광주 광산의 백우산 기슭에 있다. 사실 광주의 서북쪽 끝인 광산 쪽에는 아무리 뒤적여봐도 도대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월봉서원은 다르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사람들이 찾아든다. 부드러운 구릉에 들어선 서원은 한옥과 돌담으로 차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빼어난 경관’이라고 치켜세울 정도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원은 본래 서 있던 자리에서 옮겨지고 무너졌다가 1941년에야 다시 지어진 것이다. 그러니 서원의 건축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그저 좌우대칭의 깊이감 없는 공간으로 서 있을 따름이다.

월봉서원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곳이 기리고 있는 인물의 위대함으로 대들보를 삼는다. 옛 선비들의 강학 공간이 서원이었으니 지금의 ‘사립학교’라 할 수 있지만, 서원이 지금의 학교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저마다 위대했던 학자를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선대의 최고 학자를 서원 뒤 가장 높은 자리의 사당에 모시고, 유생과 선비들은 공부에 몰두하며 그 앞에서 존경심을 갖고 향을 피워올린다. 월봉서원이 기리고 있는 인물은 고봉 기대승이다. 

기대승은 조선 중기에 성리학자로 우뚝 선 인물이었다. 기대승의 학문하는 자세는 치열했고,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래서 그는 논쟁적이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맞붙었다. 퇴계와도 논쟁을 벌였고, 율곡과도 반목했다. 가장 유명한 건 퇴계와의 8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논쟁이었다. 퇴계는 기대승보다 자그마치 스물여섯 살이나 많은 노학자였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철학적 논쟁의 주제보다는 새파란 나이의 젊은 선비와 당대 최고의 석학이 서로를 예우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학문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 편지로 오고 간 논쟁을 당대의 선비들이 베끼고 나눠 읽었으며, 여기다 주장을 보태면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나간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교란 ‘불통(不通)의 고집’이 아니라 ‘소통과 교류’라는 걸 보여준 것이다.
 

 

▲  하서 김인후의 고향인 맥동마을 어귀 길옆으로 비석 크기만 한 바위가 있다. 이른바 ‘붓바위(필암·筆巖)’다. 마을 주민들은 김인후의 뛰어난 학식이 이 바위의 기운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 차가운 달과 함께 ‘철학의 길’을 걷다   


기대승은 논쟁 상대인 퇴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지만, 반대로 보면 퇴계로 말미암아 그는 지워졌다. 퇴계가 지닌 ‘아우라’는 기대승이 기억될 공간마저 다 빨아들였다. 임금마저 가르치려 한 기대승의 정치적 견해는 입신이나 출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정치적 타협이 없으니 동인과 서인, 어느 쪽에도 기대승의 지분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후학들이 대부분 임진왜란의 와중에 의병으로 앞장섰다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그가 기억될 공간은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럼에도 기대승을 배향하는 월봉서원에는, 지금 사람들이 몰려든다. 

전남 장성과 광주의 서북부를 흘러가는 영산강의 지류 황룡강 인근의 너부실 마을. 거기에 월봉서원이 있다. 너부실 마을은 소박하되 푸근한 시골 마을이다. 서원 주변을 정비한다고 손을 댄 것이 오히려 주변의 경관과 어긋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보통인데, 너부실 마을에서 서원으로 드는 돌담길은 참 자연스럽다. 

월봉서원은 너부실의 부드러운 산비탈에 있다. 그 앞에 서면 당당한 규모의 서원 전체 모습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서원의 중심 건물은 강당인 ‘빙월당(氷月堂)’. 정조가 기대승을 두고 ‘빙심설월(氷心雪月)’과 같다고 평가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효종이 기대승이 죽은 뒤 내려보낸 제문(祭文)에서 그의 사람됨이 ‘잘 단련된 금과 같고 윤택한 옥과 같으며, 물 속의 달처럼 맑고 투명한 병과 같다’고 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도 전한다.  
 

 

 

# 성리학이 인문학으로 옷을 갈아입다   


월봉서원 뒤쪽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기대승의 묘와 생전에 학문을 강론했다는 귀전암터를 거쳐 벚나무 숲에 갇힌 정자 백우정으로 이어지는 제법 긴 오솔길이다. 줄곧 향긋한 솔숲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을, 옥색 한복을 입은 이들이 걷고 있었다. 월봉서원의 선비체험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월봉서원의 선비체험은 잠깐 한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식의 체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서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꼬마철학자 상상학교’가 열리고,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진로상담 프로그램이 있다. 청년들에게는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했던, 이른바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인들에게는 차와 대담, 산책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을 주고, 밤이면 문화공연과 인문강좌인 살롱강의가 열린다. 고리타분한 성리학 이야기들이 앞장선 이의 소리 한 자락, 혹은 구수한 이야기로 생명을 얻는다.  


#장성 필암서원… 정조의 현판, 송시열의 편액 


월봉서원을 멀찌감치 끼고 흐르는 황룡강의 상류에 이름난 서원이 또 하나 있으니 그곳이 바로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이다. 기대승과 함께 호남 유학의 양대 인물로 꼽히는 하서 김인후를 모시고 있다. 기대승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인후는, 기대승보다 열일곱 살이 더 많은 선배였다. 당대 유학자 둘이 삼십 리 안쪽에서 살았던 셈이었지만,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던 시기가 다른 탓에 이들이 평생 만났던 건 두어 번뿐이었다. 김인후와 기대승은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김인후의 손자가 기대승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이었다. 김인후의 손자 며느리이자 기대승의 딸이었던 ‘기씨 부인’의 비극적인 죽음의 얘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필암서원은 월봉서원과는 달리 대원군의 서원철폐 과정에서도 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김인후의 명성 덕이었다. 김인후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 역사를 통틀어 배향된 18현(一八賢) 중 호남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뽑혔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이렇게 추앙받는 데는 그가 길러낸 정철, 변성온, 윤기, 조희문 등 기라성 같은 후학들의 힘이 컸을 것이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고 물난리로 떠내려 간 적도 있지만, 필암서원은 마지막으로 다시 지어진 1672년 이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필암서원에는 건축적 미감과 함께 곳곳에 눈길을 붙잡는 것들이 적잖고, 이런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먼저 문루이자 정문 격인 확연루에 내걸린 힘찬 필치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솜씨. 송시열은 김인후가 죽고 나서 묘소 아래 세운 비석(신도비)에 새기는 문장을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다듬고 또 다듬어서 지었다고 전한다.

서원 안쪽의 한 칸짜리 건물인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 임금의 글씨다. 경장각은 인종이 직접 그려 김인후에게 하사한 대나무 그림 판각을 모셔 두기 위해 지은 전각. 여기에 훗날 정조가 친필로 경장각의 현판을 써서 내려보냈다. 대나무 그림은 지금 광주박물관으로 옮겨가고 없지만, 건너편 박물관에 판각을 모사한 그림이 걸려있다. 그림 속의 가늘고 검은 대나무의 굳은 심지가, 당쟁의 소용돌이를 뒤로 하고 고향으로 낙향해 은거했던 김인후의 삶의 행적으로 읽힌다.   


 

▲  글자 한 자 새기지 않은 백비와 박수량의 묘. 박수량은 지금으로 치자면 장관 네 번과 서울시장 등의 고위관직을 거쳤음에도, 워낙 청빈한 삶을 살아 늘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다.

 


# 기대승의 딸 ‘기씨 부인’의 비극적 죽음  


김인후의 고향은 필암서원에서 멀지 않은 맥호리의 맥동마을이다. 마을입구에는 붓바위, 곧 ‘필암(筆巖)’이 있다. 붓바위는 그 기운으로 이름난 문인이나 학자의 탯자리가 될 형상임을 암시하는데, 보통은 산봉우리에 그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맥동마을의 필암은 자그마한 비석 크기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형상의 바위였다. 주위에 붓바위로 삼을 만한 그럴 듯한 암봉이 없음에도 작은 바위라도 찾아서 필암의 이름을 붙여주었던 건, 김인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존경심 때문이었으리라.

이제, 뒤로 미뤄두었던 김인후의 손자 며느리이자 기대승의 딸 ‘기씨 부인’의 이야기. 정유재란 때 처가인 월봉서원 인근으로 몸을 피했던 기씨 부인이 집으로 돌아오다 왜병과 맞닥뜨렸다. 자신을 능멸하는 왜병에 맞선 기씨 부인은 왜병의 팔을 뿌리치려 스스로 팔을 잘라내고 황룡강의 물로 빠졌다고 전한다. 끝내 기씨 부인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팔 하나만 남았으니 무덤에 그 팔 하나만 묻을 수밖에 없었다. ‘한 일(一)’에 ‘팔 비(臂)’ 장사 장(葬)자를 써서 그 무덤을 ‘일비장(一臂葬)’으로 부르는데, 맥동마을의 김인후 묘로 올라가는 아래쪽의 양지바른 곳에 그 무덤이 있다.  

 


# 백비… 그리고 100여 개의 현판   


기왕 장성까지 간 걸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아곡 박수량의 ‘백비’다. 기대승과 김인후보다 더 선배 격인 박수량은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 자리에 올랐고 형조, 예조, 공조, 호조판서 직을 두루 역임했으니 네 개 부처의 장관을 지낸 셈이지만, 죽을 때 유산이라고는 술잔 하나와 갓끈 한 타래만 남겼을 정도로 청빈했다. 그는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유언했으나 정조 임금이 서해에서 캔 흰돌을 비석으로 내려보내며 ‘청빈한 삶이 욕되지 않도록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는 명을 내려 무덤 앞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은 ‘백비’가 세워졌다. 근래에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모양인데, 무덤 아래 시멘트 벽에다가 다녀간 소속 부처와 공기업의 현판을 저마다 경쟁하듯 붙여 놓았다. 그냥 아니 간 듯 슬쩍 들를 일이지 ‘이곳을 다녀갔다’며 자랑스럽게 정부 부처와 공기업이 새겨놓은 현판 100여 개는, 글자 한 자 새기지 않은 백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광주·장성=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원문링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4060103291204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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